수술 직후 두 달 동안 미라 상태였단다. 그동안 어디 있었나. 몸은 이대로 누워 있었을 텐데, 나는 어디서 무얼 했나. 나라고 할 만한 어떤 것이 내 몸뚱이에 있기나 했나. 지금 떠오르는 풍경 중 가장 선명한 것이 있다. 관광지에서 파는 그림엽서 같은 것이 방 안 여기저기 붙어 있는데, 그중 몇 장이 선연하다. 택배 상자가 열려 있는 채로 엎어져 있는 그림이다. 박스에서 삐어져나온 아기의 손이 유난히 희다. 베란다에 있는 관음죽 화분이 들어앉은 그림도 있다. 관음죽 초록 잎들 사이에 꽃이 붉게 올라왔다. 마치 홍역 앓는 아이의 얼굴처럼 작은 돌기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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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가 갓난아기를 택배로 보내왔다.
나는 놀라서 쓰러졌다. 감금증후군 환자가 됐다.
갓난아기는 죽어 냉장고 속에 갇혀 있고, 나는 살아 냉장고 밖에 갇혀 있다. 그리고 둘 다 얼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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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는 인형이었습니다. 내가 어릴 때 갖고 놀던 베렝구어 인형이었어요. 눈을 감고 숨을 쉬지 않는 인형. 나는 허겁지겁 아기를 들어 올려 화장지에 쌌어요.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둘러쓴 아이는 누에고치 같았습니다. 휴지통을 비우고 아이 고치를 비닐에 넣으려는데, 끈에 걸려 휴지통이 쓰러졌습니다. 끈이 아니라 탯줄이었어요. 아기와 내가 줄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어요. 아이가 갑자기 첫울음을 터뜨렸어요. 갑작스런 울음에 놀라 나는 아기 두루마리를 내팽개쳤습니다. 울음은 더 커졌습니다. 아기 울음소리가 천장을 찢고 건물을 무너뜨리는 듯싶더니 내 온몸을 쑤셔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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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곡가며 가수여서 다른 가수들보다 두세 배 이상 노력했다. 공연 날짜가 잡히면 리허설 당일까지 적어도 삼 개월은 구성원 전원이 합숙 훈련을 했다. 녹음실에 제일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했다. 한 곡을 녹음하기 위해 반드시 녹음 일주일 전 백 번 이상은 불러보아야 불안하지 않았다. 만족을 못하면 녹음을 미뤘다.
그게 나였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한눈팔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흡족했다. 몸과 마음이 따로가 아닌 줄 이번 뇌졸중 이후 뼈저리게 알게 됐다. 나는 몸의 한계를 모른 체했다. 연습해서 녹음하고 나면 온 관절이 쑤셨다. 목앓이도 지독했다. 손발톱이 빠질 듯했다. 진통제로 버텼지만 한계가 있었다. 몸이 아프니까 마음도 약해졌다. 자존감을 놓지 않으려는 욕심이 문제였다. 팬들이 나를 외면해서 아픈 것이 아니었다. 내가 욕심이라는 고름을 키우고 살아왔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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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정치를 초월하는, 종교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내 생각에 스승은 콧방귀를 뀌었다. 예술은 사람들의 삶에, 현실에 밀착돼야 가치 있다. 그들이 호응해 줘야 작곡도 하고 노래도 부를 수 있지 않나? 노래는 누군가 불러야 노래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많이, 오래 불려야 명곡이다, 라고 스승은 말해왔다. 스승과 다르게, 예술에는 현실적인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심 없는 욕망의 성취가 예술 아닌가. … 내 사심은 내 예술적 욕망에 맞춰져 있는가. 대리 작곡자인 나는, 그 대가로 살아가는 나는, 예술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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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년 전 윤주를 포항에 데리고 갔다. 윤주와 해변을 거닐며, 노래비를 함께 바라보다가 한 줄기 선율이 문득 떠올랐다. 그 두 마디는 저녁 내내 입에 고여 있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들어간 리조트에서 물회를 안주 삼아 소주를 머금었을 때 멜로디는 가지를 뻗어나갔고, 그녀를 침대에 앉히고 그녀의 가슴에 입을 맞추었을 때 주제의 발전이 화산이 되어 터져 나왔다. 멜로디는 마그마처럼 구절구절 뜨겁게 넘실거렸다. 곡은 윤주와의 절정 중에 완성되었다. 윤주와 나는 불길을 가라앉히며 완성된 곡을 함께 흥얼거렸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의 몸에 선율을 적어나갔다.
그녀는 내 채보에 따라 노래하다가 중얼대다가 웃었다. 연주를 마쳤을 때 나는 이번 곡이 내 음악의 결정체라 직감했다. 사랑이 끝난 뒤, 나는 곡이 날아갈까 봐 침대 탁자에 놓인 티슈에 채보했다. 윤주가 뒤에서 끌어안는 바람에 처음 두 소절을 적다가 그만두었다. 나머지는 윤주의 몸에 다시 채워졌다. 우리는 자석처럼 다시 붙었고, 윤주는 내 곡을 암보하겠다는 듯이 몇 차례 깊은 호흡으로 받아 허밍으로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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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윤주에게 더 달려들었다. 그리고 윤주의 입으로 외삼촌의 실체를 말하게 했다. 비밀은 없다. 진정한 사랑은 비밀을 만들지 않는다. 윤주와 나, 그리고 현우 선생은 진정한 사랑을 나누려 했지만 현실이 그를 가로막았다. 우리의 현실은 너무 복잡했다. 모두의 욕심이 얽혀 있었다. 단순하고 진실을 원하는 사랑은 복잡한 현실을 견디지 못했다. 나는 윤주에게 외삼촌은 현우 선생이 아니냐고 물었다. 아무런 응대 없음으로 답을 준 윤주는 나를 달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 사건 이후, 그녀는 오히려 편안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두 남자 사이를 스스럼없이 오갔다. 윤주는 내게 와서 함께 밤을 보낼 때 내 앞에서 스승과 문자를 나누기도 했다. 윤주에게 사랑은 외로움을 막아주는 방패였고, 내게 사랑은 그 방패를 뚫어야 하는 창이었다. 스승은 창이면서 방패로 윤주를 감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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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는 대체 어디 있나, 스승이 식물인간 상태인데…, 사랑한다더니…, 하나님이라더니…, 숨만 간신히 쉬는, 갓난아이 같은 노 환자인데…, 이렇게 무심할 수 있나. 윤주가 궁금하다. 그녀가 내게서 떠났듯 현우 선생과 이별했음이 분명한데, 어디서 무얼 하나, 스승의 소식은 들었는지…. 그녀에게 사정이 있으리라 생각하니 더 보고 싶다. 현우 선생과 윤주가 나를 속이며 외면하더니, 이젠 두 사람 모두 떨어져 있다.
코끝이 시려온다. 더 살갑게 대해 줘야 했는데, 못해 주었던 내 한계에, 미안했다. 윤주는 나를 사랑하기나 했나. 누구든 사랑하지 않고는 자기를 사랑하지 못한다던 윤주 아니었나. 오로지 나만을 사랑한다던, 오로지 현우 선생만의 사랑이기를 원했던 윤주. 윤주가 스승과 나를 떠난 것은 스승을 위해서인지, 나를 위해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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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가 무대에서 뛰어내려 물웅덩이 쪽으로 달려간다. 그녀는 인형을 집어들고 자기 웃옷을 벗어 인형에 들씌운 채 물에 엎어진다. 물이 깊다. 어느새 성재가 달려와 윤주를 쫓아 물웅덩이에 풍덩 빠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우도 벌떡 일어나 차에서 내려 겅중겅중 걸어간다. 현우는 물웅덩이 앞에 서더니 풀쩍, 다이빙한다. 세 사람 모두 윗옷을 벗어 인형에 덮어씌운다.
우리는 알몸으로 인형 주위를 맴돌며 헤엄친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수압만 묵직하게 느껴올 뿐 주위는 고요하다. 우리는 숨이 막혀 가슴이 터질 듯, 아프다. 멀리서 작은 진동이 시작되면서 하나의 음정으로 피어오르려 한다. 물속의 숨 막힘 안에서 생겨난 하나의 음은 우리의 주위를 감싸고돈다. 어느새 숨 막힘은 한 호흡에 사라지고 조여들던 가슴도 풀어진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하나의 음정을 따라 물속을 흐른다.
여유롭고 평화롭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