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는 마한의 중심지였다가 백제에 병합되었다. 왕도(王都)가 들어선 적이 없는 변방이지만, 모든 것이 풍족하다. 땅이 넓고 경치가 빼어나며 문화 전통이 자랑스럽다. 시인, 화가, 명창이 이어져 나왔다. 영광 굴비, 목포 낙지, 흑산도 홍어를 특히 자랑하는 맛의 고장이다. 비옥한 토지에서 소출이 많아 나와 나라 살림을 지탱한 것은 다행이지만, 수탈자가 안에서 횡포를 부리고 밖에서도 밀어닥쳤다. 그러다가 망국의 위기에 빠지면, 분연히 일어나는 의병이나 지사가 적지 않았다. 일제의 침략과 수탈이 시작된 1902년에, 광양 출신의 우국 시인 매천(梅泉) 황현(黃炫)이 전라남도를 가로지르는 기행시를 지었다. 「발학포지당산진」(發鶴浦至糖山津, 학포에서 출발해 당산포에 이른다)이라고 하는 것이다. 괴이한 변화가 통탄스럽다고 하면서도, 곳곳의 경물을 잘 그려내 뛰어난 그림이다. (중략) 전라남도로 오라. 이 시를 마음에 간직하고, 황현이 간 길을 다시 가보자.
---「책머리에」중에서
섬진강 이름의 유래
고려 말인가 임진왜란 때인가 왜군이 쳐들어와서 우리 군사들이 쫓겼다. 강을 건너려고 하니 배가 없었다. 그때 강에서 무수히 많은 두꺼비가 떠올라 다리를 놓아주었다. 우리 군사들이 다 건너고, 뒤를 쫓아오던 왜군이 건널 때 두꺼비들이 모두 강 속으로 들어가버려 왜군은 다 빠져 죽었다. 그때까지 두치강(豆恥江)이던 강을 ‘두꺼비강’이라 해서 섬진강(蟾津江)이라고 하게 되었다.
● 섬진강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명쾌하게 설명된 것 같지만, 두꺼비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말하지 않아 의문으로 남는다.
---「광양」중에서
버들잎이 맺어준 왕건의 인연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하기 전 나주에서 10년간 머물렀다. 어느 날 위쪽의 산 아래에서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일어 가보았다. 샘에서 아리따운 여인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물 한 그릇을 청하자, 여인은 버들잎을 띄워 주었다. 급하게 물을 마시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그 샘을 빨래샘 또는 완사천(浣紗泉)이라고 한다. 왕건은 총명함과 미모에 끌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 여인이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 부인이고, 그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 제2대 혜종(惠宗)이다.
● 마실 물에 버들잎을 띄워 주는 여인의 배려가 역사를 돌려놓았다.
---「나주」중에서
그림자에 몸을 감추는 정자, 식영정
식영정(息影亭)은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조선 시대 정자이다. 명승 제57호. 지금의 식영정은 목조 기와집 형태로 돼 있지만 「식영정기」에서는 “띠풀로 이엉을 얹고 대나무로 벽을 두른 배와 같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식영정 입구 쪽 언덕 아래에 부용당과 서하당이 자리 잡고 있고 길 건너편에는 증암천이 광주호로 흘러들고 있다. 과거에는 이 개천을 자미탄이라 불렸는데, 주변에 배롱나무[紫薇]가 무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자미탄 건너편에 있는 환벽당의 손님들이 나룻배로 자미탄을 건너 식영정을 오갔다고 한다. 주변 일대의 한적하고 수려한 풍광은 이곳에 식영정이 자리 잡게 된 이유다.
---「담양」중에서
경계 없는 산수정원
보길도 윤선도 원림에는 인위적 경계가 없다. 세연정 주변의 세연지와 바위, 연못 속에 헤엄치는 물고기, 주변의 고목과 단풍 그림자뿐만 아니라 멀리 보이는 산,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까지도 원림에 포함된다. 더 나아가 공산에 걸린 달, 밤하늘에 빛나는 별, 새소리, 벌레 소리 등 보길도의 모든 자연환경이 원림의 구성 요소가 되고 감상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구획된 일정 공간을 인위적으로 꾸미는 서양의 ‘가든(Garden)’과는 전혀 다른 한국의 정원 개념이다. 한국인의 심성은 자연 속에 들어가거나 멀리서 바라보고 감상할 뿐 가까이서 관찰하거나 과도하게 다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윤선도 원림은 이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담양 소쇄원과 화순 임대정 원림 등 조선시대 별서(別墅) 정원도 윤선도 원림과 같은 성격과 개념을 가진 산수정원이다. 원천적으로 대자연은 소유자가 없다. 산과 물, 하늘의 별과 달,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은 즐기는 자의 것이다. 고산은 보길도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대자연의 주인임을 자처했던 것이다.
---「완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