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아저씨.”
백수 생활을 하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사귀게 된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분리수거를 자그마치 여섯 달이 넘도록 하다 보면 경비실 아저씨와 허물없는 사이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누가 찾아왔는데?”
“누가요?”
“글쎄, 젊은 남잔데. 아마 608호에 볼일이 있는 모양이야. 뭘 좀 전해줄 게 있대나…….”
“남자라고요?”
“응. 저기 아직도 안 가고 서 있는데?”
박씨 아저씨의 굳은살 박힌 손가락이 향한 곳을 바라보니 한 남자가 멀뚱하게 서 있다. 나는 수연에게 또 목매는 남자인가 싶어 입술을 삐죽거린다. 허, 이것 참. 이 언니께서 나서야 할 타임이 돌아왔군.
우리 황씨 가문의 여자들은 엄마와 나를 제외하고 모두 미모가 빼어나다. 그래서인지 언니는 물론 동생에게는 늘 남자가 끊이지 않는다. 재작년 수연이 미대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웬 장발의 남자가 우리 집까지 찾아온 적이 있다. 뭐, 첫눈에 반했대나 어쨌대나.
그 이후 우리 집에는 새빨간 머리에 검은 가죽옷을 쫙 빼입고서 등장한 전위적인 스타일을 비롯해서 물귀신 뺨치게 길게 치렁거리는 록커 헤어스타일이라던가, 혹은 양반댁 마님들한테 한 인기했을 법한 건장한 체구의 머슴 타입, 그리고 돈깨나 있을 것 같은 럭셔리한 놈들이 줄줄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들을 모조리 돌려보내곤 했다. 아무튼 오래간만에 동생을 찾는 남자를 맞이하게 되니 문득 감회가 새롭다. 자, 오늘은 수연이 고것한테 들키지 않고 어떤 식으로 녀석을 내쫓을까나.
아파트 출입구의 훤한 불빛 아래에 서 있는 남자는 아이보리 색깔의 두툼한 파카와 말쑥한 블랙 진을 입었는데 짧게 친 스포츠형 머리를 칭칭 감고 있는 새파란 목도리가 유난히 짙었다.
“저기, 혹시 608호에 사시는 황우연 씨 맞죠?”
남자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예? 마, 맞는데요……?”
생판 모르는 남자가 나를 알고 있다니?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정체불명의 남자를 쳐다봤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 모습이 제법 매력적이다. 흠흠, 너 내 마음에 든다, 귀여운 것.
“죄송합니다만, 전 그쪽을 전혀 모르는데…….”
긴장을 늦추지 않고서 예의 바르게 대답하는데 남자가 싱겁게 벙싯거렸다.
“괜찮아요. 이제부터 알면 됩니다.”
나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진다. 누구냐, 넌?
“실례지만 누구신지…….”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유심히 바라볼 뿐이다. 그 눈빛이 진지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오르고 기분도 이상해진다. 헤이, 맨. 아무리 내가 한 미모 해도 그렇게 초면에 뚫어지게 쳐다보면 실례란다.
“우선 이것부터 돌려주는 게 좋겠죠?”
그가 불쑥 내민 종이 가방을 받아 들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죠?”
“그날 놓고 간 물건입니다.”
“예……?”
잽싸게 종이 가방 안의 물건을 확인한 순간 내 눈은 하얗게 까뒤집어졌다. 세상에, 이건 엊그제 서점에서 샀던 중수의 책? 할 말을 잃어 입을 딱 벌리고 있는데 파란 목도리가 슬쩍 웃는다.
“맞죠?”
“예, 맞긴 한데요, 어떻게 이걸…….”
“아, 그렇구나. 날 못 알아보는구나. 분위기 좀 바꿔보려고 어제 머리도 자르고 까맣게 염색했거든요.”
이보세요, 염색을 하건 얼굴에 분칠을 하건 간에 나는 댁의 얼굴을 처음 본다고.
“실례지만 누구시죠?”
멋쩍게 미소 짓는 남자에게 나는 정색하고 딱딱하게 물었다.
“아무튼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군요, 황우연 씨. 물론 나중엔 좀 원망스러웠지만…….”
난 처음부터 상대가 내 이름을 말하는 게 왠지 기분이 나빴다. 이봐, 너 말이야. 언제부터 날 봤다고 말끝마다 우연 씨, 하고 말하는 거야? 도대체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니?
“뭐가 고맙다는 거죠?”
“그거요.”
“그러니까 그게 뭐요!”
나는 어쩐지 초조해져서 빠른 말투로 물었다. 아, 뭔가. 불길한 이 느낌은.
“그날 토요일, 서점에서 바로 제 바지 지퍼를…….”
끅. 나는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서, 설마 이 사람이 그 변태남? 불량스런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거시기가 지퍼에 꼈던 그 남자?
“그, 그럼 당신이 그 변태남?”
나도 모르게 이렇게 불쑥 내뱉자 수줍은 미소를 짓던 남자의 새까만 눈썹이 비 오는 날 땅바닥에 나뒹구는 지렁이처럼 심하게 꿈틀거린다.
“변, 태남……?”
세상에, 다시는 만나지 않도록 그토록 천지신명께 빌었건만 어째서 저 변태남과 딱 이틀 만에 다시 마주친단 말인가. 더군다나 어떻게 내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걸까?
“하하, 어째 그런 말은 듣기 좀 그렇군요. 변태남이라…….”
뺨을 붉힌 변태남은 나를 힐끔거리더니 자꾸만 쿡쿡거렸다.
“실수로 바지 지퍼 잠그지 못한 걸로 별소릴 다 듣는군요.”
우와, 어쩌냐. 진짜, 정말, 분명하고, 틀림없는 변태남이었다. 난 이제 죽었다!
“음, 그래도 그때 우연 씨의 용감한 행동은 정말 고마웠어요.”
나는 너무나 놀라서 눈앞의 남자가 뭐라고 말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라, 우연히 처음 만난 사람이 갑자기 집 앞에 떡하니 나타났는데 공포감에 떨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혹시 제가 찾아와서 놀랐나요?”
돌처럼 굳어진 내 얼굴을 본 변태남이 짐짓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다. 그래! 너무 놀라서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다! 자칫하면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몰라. 책임질래?
“어떻게 알고 여기를…….”
“아, 그게 어찌하다 보니까 알게 되었어요.”
야, 넌 내가 바보인 줄 아니? 도대체 어떤 불법적인 루트를 통해서 여기로 찾아왔으며 어떻게 내 이름까지 알았는지 어서 불지 못해? 네놈과 연계된 범죄 조직은 무엇이며 또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빨리 말해보란 말이다!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폭주하는 온갖 두려운 상상 때문에 나는 괴롭게 헐떡거렸다. 지금 내겐 산소, 산소가 부족해!
“괜찮아요, 우연 씨?”
오오, 제발 내 이름 좀 부르지 말아줘, 변태남. 넌 지금 내 팔에 소름 돋는 것도 안 보이냐? 근데 너 말이야, 그날 사건으로 앙심을 품고서 나한테 해코지하러 온 거니? 아니면 내 예상대로 암흑 세계와 관련된 모종의 뒤처리 때문에? 그렇다면 내가 바보멍청이처럼 두 눈 멀쩡히 뜬 채 그대로 당할 줄 알아? 그야 당연히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주겠다!
“저기, 미, 미안해요! 그때 그 일 때문에 온 거라면…….”
나는 짐짓 울먹거려 본다.
“괜찮아요.”
“아녜요, 그렇게 무책임하게 도망쳐서 미안해요.”
침착하자, 황우연. 일단 그 비극적인 거시기 사건이 전혀 나쁜 의도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는 걸 이 녀석한테 적극적으로 설명하자. 그리고 기어코 나를 찾아낸 그 집요한 행동에 침착하게 대처해야 해. 그러려면 상대의 심리적인 안정부터 최적화하는 게 가장 중요하지. 암, 그렇고말고.
“거, 거기는 이제 괜찮아요?”
나는 한껏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음.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한번 확인해볼래요?”
헉. 변태남의 과격한 제안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놈은 성희롱이라는 저급한 방법으로 내게 복수하려는 걸까.
“하하, 미안해요! 농담이에요.”
그따위 농담 한마디만 더 하면 오늘이 네 제삿날인 줄 알아라.
“이젠 그럭저럭 걸을 만하네요.”
그렇다면 그전엔 잘 걷지도 못했단 말인가. 결국 119를 불러서 들것에 실려갔을까. 밀려드는 공포감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바보 같은 호기심이 솟구친다.
“아무튼 다행이네요. 사실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드러운 미소가 걸린 단정한 입매였지만 어쩐지 내 눈에는 죄다 가식처럼 여겨졌다. 이놈은 그날의 복수를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게 틀림없다. 아, 지금 엘리베이터로 뛰어들어 가 냉큼 집으로 도망칠까, 아니면 관리실의 박씨 아저씨한테 도움을 청해볼까.
“사실은 그 책을 꼭 돌려줘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집까지 찾아온 겁니다, 우연 씨.”
“그냥 제 책을 돌려주기 위해서요?”
나는 태연한 얼굴로 조용히 되물었다.
“정말이에요?”
“정말입니다.”
“진짜로요?”
“진짜입니다.”
“믿어도 돼요?”
“믿어도 됩니다.”
“사실인가요?”
“사실인데요.”
나의 집요한 추궁에도 아랑곳 않고 꼬박꼬박 대답하는 그는 순진한 유치원생처럼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혹시 저를 의심하는 건가요, 우연 씨?”
변태남이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적색경보! 누가 보면 꼭 키스라도 할 것처럼 야릇한 포즈잖아!
“저기요, 어떻게 여길 찾아왔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제 책을 이렇게 돌려줘서 참 고맙고요, 며칠 전 황당한 일을 겪었어도 제게 악감정이 없어 보이니 정말 다행이고요,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바쁘셨을 텐데 많이 죄송하고요, 이젠 어서 댁으로 돌아가서 발 닦고 편히 쉬길 바라고요, 전 이만 집으로 들어갈게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짜르르 내뱉어서 머리가 핑 돌 것 같았지만 나는 고개를 에의 바르게 꾸벅 숙이자마자 잽싸게 엘리베이터로 돌진했다. 그런데 그 변태남이 곧바로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이다! 으아아아악! 나는 마음속으로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질러댔다.
“왜, 왜 따라오는 거죠!”
“잠깐 기다려 봐요, 우연 씨.”
그는 막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려는 내 앞을 막아섰다.
“아니, 도대체 그쪽은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죠?”
“그쪽이 아니고 진우입니다, 이진우.”
“예?”
“내 이름이 이진우라고 해요.”
어우, 내가 언제 네 이름 듣고 싶대? 너, 맞고 갈래, 그냥 갈래.
“그래서요?”
“그냥 그렇다구요.”
이거 사이코 아냐? 화가 나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 재빨리 닫힘 버튼을 누르는데 그가 열림 버튼을 누른 모양인지 문이 닫히다가 다시 스르르 열린다. 신경질적으로 다시 닫힘 버튼을 힘껏 누르자 상대 역시 버튼을 조작하는 것이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성질이 나서 버튼을 마구 누르는데 그 또한 지지 않고 계속 눌러댄다. 우리가 버튼을 서로 눌러대는 바람에 엘리베이터 문은 닫히지도 열리지도 않는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젠장, 이러다가 과부하 걸려서 엘리베이터 고장 나겠다!
“이, 이보세욧!”
“미안해요, 제가 장난이 지나쳤어요.”
그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참 동안 소리내어 웃었다. 그 순간 나는 난생처음 살의에 대한 충동을 느끼고 말았다.
“도대체 왜 그래요!”
내가 악을 써대자 그는 정색한 얼굴로 변했다.
“사실은 우연 씨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뭐요!”
“며칠 후면 크리스마스인데 혹시 특별한 약속 없으면 만나고 싶습니다.”
“왜, 왜요?”
“이렇게 집까지 와서 책도 돌려드렸는데 저한테 감사의 답례로 밥 한 끼 정도 사주고 싶지 않나요?”
예상치 못한 상대의 요구에 나는 심장마비에 가까운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이것 봐, 변태남. 그러니까 나한테 바바바, 밥을 얻어먹겠다고? 너 설마 지금 내 수중에 현금이 있다는 정보까지 알고 온 거니?
“싫어요?”
기대로 가득 찬 변태남을 바라보던 나는 잠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도대체 생판 모르는 여자네 집으로 대뜸 찾아와서는 느닷없이 밥을 사달라니, 설마 너 나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니? 혹시 네가 속한 범죄 조직과 연루된 단서가 아직도 나한테 있다고 의심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내가 순순히 아무한테 밥이나 사줄 만큼 맹한 여자로 보이니?
“엄머머, 미안해서 어쩌죠? 사실은 크리스마스이브엔 제 애인하고 데이트가 있어서요.”
잘한다, 황우연.
“어, 그래요? 남자친구 있었어요?”
말끝에 호홋, 하고 코웃음을 흘리며 훔쳐본 변태남의 표정은 의외로 무덤덤하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내가 변태남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네자 그는 가볍게 웃는다.
“할 수 없군요. 그렇다면 크리스마스이브 때 전화나 한번 할게요.”
막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변태남이 작게 속삭였다. 뭐야, 저 인간이 설마 내 휴대전화 번호까지 알고 있다는 말인가? 순간 현기증이 나면서 두 다리가 후들거린다. 아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스토킹남?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