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치고 춘천으로 갔다. 속칭 '뺑뺑이'라는 걸 돌려 춘천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낯선 도시에서의 고등학교 생활은 조금 우울했다. 늦게 찾아온 사춘기와 안개처럼 몰려드는 고독 속에서 점점 말을 잃어갔던 날들이었다. 대학은 국문과로 가고 싶었는데 막상 불문학과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프랑스 소설들을 조금씩 훔쳐보며 소설가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소설가가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대학 재학시절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돌, 구르는 소리』로 당선 됐다(1991년). 휴전선에서 근무하는 병사의 이야기다. 대학을 졸업하고 수원에서 살았다. 수원 화성을 따라 걸으며 소설을 꿈꿨다.
그곳에서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1996년). 대학시절에 썼던 소설을 고쳐 쓴 것인데 최루탄 분분히 날렸던 80년대 검문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여전히 추위는 가시지 않았고 수원 생활도 정리해야만 했다. 춘천에서 잠시 머물다가 2000년 1월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도 역시 엄동설한의 겨울이었다. 고향에 새로 생긴 작은 도서관에 앉아 추위를 달래며 책을 넘기고 소설을 끼적거렸다. 소설에 대한 꿈을 이제 그만 포기할까 고민하며 집과 도서관을 오가고 있던 차에 신문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밤중에 당선 소식을 알려주는 게 믿어지지 않았는데 휴대폰을 잡은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게 바로 2000년 제1회 중앙신인문학상 당선 소식을 알리는 중앙일보 문화부기자의 전화였다. 추위가 조금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부터 게으르게 소설을 쓰며 지금까지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소설집 『0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십오야월』 『이별전후사의 재인식』, 장편소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아흔아홉』, 산문집 『눈 이야기』 『영嶺』이 있다. 이 중 장편소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은 임순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사랑을 받았다.
진표네 식구 역시 아버지의 술주정을 피해 선화네 집으로 피란 간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렇게 남의 집 아궁이 앞에 모여 앉아 훌쩍거리다가, 까딱까딱 졸다가, 마침내 아버지가 잠이 들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진표는 술 취해 집에 들어와 술주정을 부리는 마을의 아버지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밥상을 내던지고 엄마를 때리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아버지들을. 그럴 만한 별다른 이유가 없음에도. 마치 학교에서 월요일마다 운동장 조회를 하듯 아버지들은 술주정을 부렸다. -18~19쪽
그들은, 아니 산짐승들은 모두 돌 벽에 기댄 채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진표는 다시 눈을 비비고 산짐승들의 행동거지를 살폈다. 동굴 속에는 산토끼 외에 멧돼지, 고라니, 너구리, 오소리……. 산짐승들이 모여 있었다. -82쪽
“설마…… 인간이 되겠다고 이걸 먹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인간이 되려고 먹는 거야. 끄윽!” 토끼의 입에서 마늘 냄새가 확 피어났다. 진표는 코를 막았다. “왜?” “인간이 되고 싶으니까.”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거야?” “그러니까 먹는 거지.” -84쪽
허리까지 눈에 푹푹 빠지는 겨울 산을 오르다 보면 진정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눈구덩이 같은 질문에 빠져들게 됩니다. 제대로 빠지면 올라오기 힘든 질문이죠. 어제 제가 마침내 내린 결론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인생은 고독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고독한 인생을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 물론 옆에 개 한 마리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96쪽
이불 속으로 들어온 분이의 발가락은 익숙하게 진표를 찾아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화의 발도 더듬더듬 진표의 왼쪽 다리를 찾고 있었다. 진표는 헛기침과 함께 다리를 거둬들어야만 했다. 분이는 휘파람을 불며 노래를 따라갔다. 노래를 정지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진표는 꼼짝할 수 없었다. 등과 겨드랑이에 땀이 솟고 있었다. 잔잔한 멜로디의 노래를 비집고 벽 너머 외양간에서 소의 긴 숨소리가 넘어왔다. 테네시 왈츠는 그렇게 끝이 났다. -147쪽
바람이 소나무 가지에 얹힌 눈을 장막처럼 늘어뜨렸다. 진표는 두 손에 쥐고 있는 나무 폴로 속도를 조정했다. 까딱 잘못해 방향을 틀지 못하면 저 아래의 계곡으로 날개 없는 새가 되어 날아가는 수가 있었다. 진표는 생각했다. 동굴 속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을까. 집을 떠나간 가족들은 지금 어디까지 왔을까. 스키는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잘 나갔다. 최고의 설질이었다. 마치 구름 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184~185쪽
“독감? 가축도 독감에 걸려?” “사람만 독감에 걸리는 게 아냐. 참, 독감 얘기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가서 볼 좀 더 때 줘. 닭들이 춥다고 난리야.” “…… 나더러, 지금, 불을 때라고?” “응. 쟤네들 감기 걸려 죽으면 엄마 아버지한테 뭐라 할 건데?” “너는 왜 안 때는데?” “개보고 아궁이에 불을 때라고? 불 때는 개 본적 있어?” “…… 없어.” “일어선 김에 니가 덮고 있던 이불 소 좀 덮어 줘.” 진표는 부엌과 통하는 쪽문을 열고 나왔다. 검둥이는 문턱에 턱을 올려놓은 채 아궁이에 불을 피우는 진표를 감시하듯 내려다보았다. 진표는 말이 안 나왔다. 아궁이의 불은 잘 붙지 않고 매운 연기를 무럭무럭 게워 냈다. 말이 안 나오니 나오는 것은 눈물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