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주 작가는 한국 현대미술계에 있어서 형상조소예술의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는 작가였습니다. 또한 시대정신을 예술작품에 불어넣고자 진지하게 고민했던 이 시대의 젊은이였습니다.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와 더불어 타고난 기량과 힘을 발산한 청년 작가였습니다. 이제 그를 역사 속에 기록해 두기 위해 1주기展을 엽니다. 그의 재능과 노력을 생각하면 그저 아깝다는 생각뿐이지만, 이제 남은 이들이 그 뜻을 깊이 새겨서 우리 조각계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한 청년 작가의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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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깃발은 무엇으로 지켜지는가〉에서 〈혁명은 단호한 것이다〉 〈파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구본주는 계급적 측면의 자기 확인과 더불어 세상에 대해 어떻게 작가로서 반응하고 작업으로 담아낼 것인가에 대한 방향감각과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였다. 작가로서 전환기적 시점이었던 셈인데 이전에 노동운동 투신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작업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끓어 넘치던 욕구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으며 그렇게 바라던 노동운동의 현장을 통해 자신의 계급적 정체를 확인하면서 세상에서 자신이 감당할 몫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세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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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끝에 구본주가 생전에 남긴 시를 공개합니다. (...) 이렇게 류인의 뒤를 따라간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팩스로 받은 원고 필체가 아직 살아 있는 듯합니다.
나는 행운아다.
류인을 기억할 수 있는,
나는..
나는 행운아다.
조각가로서 그와 사제지간의 인연과
그 기억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된,
나는..
나는 행운아다.
이제 진정 그가 내게 바랬고 내가 원한 길을
같이 걸어갈 수 있게 된,
나는..
나는 참 행운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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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였던가? 조각은 이미 그 물질 안에 들어 있고, 그것을 꺼내는 것은 바로 조각가의 손이라고 했던 사람이. 로댕의 작품이 그랬던가? 그 자체의 고유한 해부학적 토대를 반영하지 않는 몸짓들, 즉 우리 자신 속의 인식 가능한 선행 경험에 논리적으로 부합될 수 없는 몸짓들을 보여주는 조각들 말이다. 아니 로댕의 작품이 그랬다기보다는 한 미술사가가 그렇게 로댕의 작품을 독해했다는 게 옳다. 열심히 두드리고 자르고 휘어서 형상화하면서도 물질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구본주의 조각은 미켈란젤로의 조각론을 수용했다고 말하고 싶다. (...) 그의 1999년 작 〈시작하는 손〉은 브론즈 캐스팅 전 소조 당시 조각가의 손놀림이 느껴지고, 미끄러운 흙의 물질성이 느껴진다. 과장되게 꺾인 관절과 부풀어 오른 근육은 억지스러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 앞에선 누구라도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손목과 손가락에 힘을 넣어 보게 되는 그런 감각적 지평을 열어 준다. 애초 〈시작하는 손〉은 다른 의미를 띠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의 〈시작하는 손〉이 (독해가 다소 과장되더라도) 조각가가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손이라 보고 싶다. 비록 그 손이 이제는 조건지어진 운명에 의해 멈췄더라도.
--- p.148
영안실에 다녀온 이튿날 학교에 와 2학년 실기실에 들러 보았다. 한 여학생이 본인의 흉상 모델링 작업 진행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유를 물으니 바로 엊그제 구본주 선생님 시간에 같이 얘기하며 수업을 하였는데 그 학생도 죽음을 실감 못하는 듯하였다. 그 학생의 흙작업에는 구본주 선생의 터치가 정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이..
--- p.161
형에게 있어서 ‘조각’은 허울 좋은 ‘예술가’라는 명분보다는 농사를 짓는 농사꾼의 모습을 갖게 하였으며 그의 타고난 근성과 부지런함은 ‘조각’이라는 또 다른 영역을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융화시켜 주는 유연제 역할을 해 주었다. 그는 정말 보기 드문 ‘조각가’이자 ‘조각꾼’이었던 것이다. 그런 형의 ‘근성’을 나는 좋아한다. 그의 작품에 정감이 더 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나른한 오후,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TV 앞에서 크고 두툼한 두 손에 그와 너무나도 비교되는 작은 나무토막과 조각도를 꼬옥 움켜쥐고 어느 공작 시간에 장난하는 어린아이같이 ‘꼼지락 꼼지락’ 손을 놀리던 형의 모습이.. 기억에 어른거린다
--- p.163
선생님을 다정다감하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리라고 생각한 것은 작품에 담긴 시선 때문입니다. (...) 그 따뜻함이 유약하지 않고 조금은 더 견고한 것은, 선생님 작품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열패감이 아닌 희망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디 엔드〉의 후줄근함, 〈이과장의 40번째 생일날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속의 숨찬 걸음, 〈이대리의 백일몽〉 속의 불안함, 〈미스터 리〉 속의 난망함, 〈아빠의 청춘〉 속의 술취함, 〈선데이 서울〉 속의 빈곤함은 하나같이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고단한 얼굴이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포기할 수 없는 단호함과 함께 결코 허망하지 않은,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얼굴들입니다
--- p.164
“농민으로부터 사무직 노동자까지, 단청에서 네온까지 일관되게 관통할 수 있는 것을 형상화하고 싶다.”고. 욕심이 너무 많은 것일까? 구본주는 다시 말을 꺼낸다. “난 아직도 소주 혹은 막걸리 냄새가 나는 작품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맥주여도 괜찮고, 양주여도 상관없다. 하여튼 삶의 애환이 담긴 술 냄새나는 그런 작품을 하고 싶다.”
--- p.174
“이렇게 어려운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삶의 주인으로 일깨우는 거지요. 〈갑오농민전쟁〉 연작은 바로 그런 취지에서 만든 작품입니다. 꼭 역사를 되새겨 보자거나 현실의 변혁 의지를 거기에 빗대 얘기하고자 했다기보다는 한 개인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충실할 수 있는가를 그 같은 혁파의 정신에서 추출해 보고자 할 것입니다.”
--- p.176
구본주에게 있어 손이란 신뢰의 출발이자 그 목표다. 손이란 노동을, 존재의 이유를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는 표지다. 그 손을 통해 그는 생존의 고난을 이겨 내는 사람들의 지혜와 함께 그들의 절망마저 어루만지고자 한다. 그의 캐리커처 조각은 소시민인 우리 자신의 자화상일 수 있다.
--- p.180
예전에 문자도 모를 때는 글을 안다는 것 자체가 어떤 계급이었다. 양반 계급만이 글을 이해하고 소유할 수 있었다. 미술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나 장소 역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만의 것이었다. 미술 자체가 현실로 동떨어진 특수한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 스스로가 그네들의 삶이 자신의 이야기로 읽어 낼 수 있다는 것. 문자의 개념과 같다고 보면 된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 p.184
〈별이 되다〉 구본주가 마지막까지 하다 간 작품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이제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 냈던 샐러리맨 아버지들이 별이 되는 거야.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볼 수 있는 별. 그들은 충분히 하늘의 별이 될 자격이 있어. 얼마나 열심히, 하루하루를 마음 졸여 가며 가족을 위해 뛰고 있니. 그들은 이 사회가 얼마나 벅찰까. 혼자 살아가기에도 힘들고 겁나는 이 세상을 가족의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겨우겨우 지탱해 가면서 끊임없이 달리고 또 달리는 그들. 이제 그들을 하늘로 올려 보내 주는 거야. 그들을 은하수처럼 하늘의 별무리로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올려다보게 해 주는 거야.”라고 했다. 지금. 그는 별이 되었다.
--- p.186
구본주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사람들이 한두 마디씩 천재와 요절이라는 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권진규, 류인에 이어 구본주. 천재와 요절을 묶어 내는 비운의 시나리오 틀을 내심 거부했던 나는 장례 기간 중에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 있는 구본주의 미공개 유고를 발견하고는 천재들은 요절한다는 각본에 의존하지 않고도 류인과 구본주 두 사람을 함께 기억할 만한 고리를 발견했다. 구본주가 그의 스승 류인을 얼마나 따랐는지, 류인은 제자이자 후배인 구본주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새삼 확인하게 한 짧은 글을 대했기 때문이다. 장례 기간에 이준희 기자가 찾아서 올린 구본주의 미공개 시는 어쩌면 이렇게 닮은꼴 운명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구구절절이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이제 그가 남긴 미완의 과제는 이승에서의 삶이 더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았다.
---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