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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새 대화 듣기

종달새 대화 듣기

시인동네 시인선-189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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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1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132쪽 | 194g | 127*203*20mm
ISBN13 9791158965686
ISBN10 1158965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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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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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에 모인 조문객들이 화투판을 벌여
서로 꽃들을 차지하는 놀이를 즐기는 도중에
누군가가
이번 판은 내가 먼저 죽을게요, 光을 팔 수 있지요, 하며
화투장을 던진다
그리고 사람들이
먼저 죽은 자에게 노잣돈을 지불하듯 동전을 건네자
동전 속의 학 여러 마리가 날아오른다
빛을 물고 있다, 빛을 먹고 있다

빛나는 인생을 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망자가
자기도 끼워주면 학처럼 날아갈 수 있겠다며
벌떡 일어날 것처럼 분위기가 무르익는 동안
간간히 들려오는 유족들의 곡소리를 제압하는
화투장의 光, 光, 光. 光, 光.

볼일 보러 온 저승사자도 光을 찾으며 놀다 가겠다
---「빛」중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종달새 몇 마리가 빗줄기를 피하러 왔는지
아파트 베란다 밖 난간에 앉았다 날아가기를
몇 차례 되풀이한다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는데도
종달새들 저 멀리 날아가고
베란다 밖 난간에 남긴
그들의 대화만 비바람에 섞여 들어온다

얘들아,
우리도 밥 먹으러 가야지
---「종달새 대화 듣기」중에서

2021년 8월 20일
열기로 가득한 프로야구 경기장을
꽃밭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왔을까
커다란 나비 한 마리
그라운드에서 1루와 2루 사이를 날아다니자
타석에 서 있던 4번 타자
갑자기 손을 들어
심판에게 경기 중단을 요청하였다

경기가 잠시 중단되자
이 상황을 지켜보던 나비가
알았다는 듯
너울너울 춤을 추며
서둘러 경기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관중들도 선수도 중계방송 하던 아나운서도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경기장은
그날 아름다운 꽃밭이었다
---「아름다운 꽃밭」중에서

새 학기 첫 번째 강의시간.
강의실 여기저기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긴장을 깨우며
출석부 속의 학생들 이름을 부르는데
김슬기, 박슬기, 이슬기 등,
슬기, 라는 이름이 유난히 많아서
이 강의실은 강이네요, 했다.
학생들이 의아해했다.
슬기, 라는 이름을 가진 세 명의 이름을 합하면
다슬기니까 여기가 강이지요.
자네들만으로는 강이 안 되는데
김바위, 라는 학생도 있어서
강이 되는 겁니다.
강은 서로 부둥켜안고 바다로 흘러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나도 강이 되어 함께할 테니 여러분도
열심히 공부해 강처럼 흘러
흘러 바다로 갑시다, 라고 부탁하자
강의실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는
강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의실에 흐르는 강」중에서

집에 불이 나서 모든 것 타버린 다음날,
전화기 밑에 넣어둔 만 원짜리 여덟 장만은
불타지 않을 수 있겠다는 얕은 기대감으로 손을 넣어 봤는데
이럴 수가, 살아 있었다. 그 지폐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지가 생물처럼 물컹거렸다

불길 속에서도
소방차가 뿌린 거센 물줄기를 허투루 버리지 않았던 것
지폐들끼리 서로 다독거리며 함께 화마에 저항했던 포옹이여
생존이란 이렇게 눈물겨운 것
불타버린 집을 지키며 마칼바람에 버틴 꼿꼿함이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의 포옹만큼이나 뜨거웠다

지폐들을 손에 넣는 순간,
가슴에서 다시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나는 또다시 세상 속을 뜨겁게 걸어갈 것이다
이들이 지펴준 불씨로, 불씨로,
---「살아남은 팔만 원」중에서

원고료로 받은 오십만 원으로 무얼 할까 고민하다
그녀에게 옷 한 벌 사주고 싶다는 말을 하자
그녀는 내게 보약 지어주겠다고
어딘가에 전화를 하며
흐뭇해하고 있는데

우리들의 고민을 한방에 해결해 준 것은
그날 오후 문자를 남기고 빠져나간
카드 값 자동이체

다행히도 잠시 머물러 있던 행복은
자동이체 되지 않았습니다
---「친절한 자동이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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