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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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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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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5년 1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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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용량 EPUB(DRM) | 0.58MB ?
글자 수/ 페이지 수 약 14.4만자, 약 4.7만 단어, A4 약 90쪽?
ISBN13 9791186603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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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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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지?”
한참 단잠에 빠진 혜준을 방해한 건 낮고 매끄러운 음성이었다. 반의 시끌시끌한 소음이 일시에 멎은 것도 한 몫 했다. 녀석이 자발적으로 말문을 튼 건 처음이라 신기해하는 것이다.
“후암. 여기서 얘기해야 하냐?”
“곤란하면 나와.”
새삼 생각하지만, 진짜 건방진 녀석이었다. 누구 생각해서 나가자는 건지 알면서 저럴까, 몰라서 그럴까.
승현은 익숙하게 옥상에 올랐다. 해마다 뛰어내리는 놈들이 있어 잠가두지만 녀석의 손엔 옥상 열쇠가 당당하게 들려 있었다. 그 꼴을 봐선 점심시간마다 승현이 가는 곳이 옥상인 것 같았다. 혜준은 느긋하게 기지개를 폈다. 옥상 공기가 생각보다 시원한 게 기분 좋았다. 더위는 여전했지만 바람은 갈수록 선선해졌다.
“왜 그랬지?”
“뭐가?”
“그 깡패들 말이다.”
“아아.”
참 일찍도 물었다. 성엽이 녀석들과 한 판 붙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러고 보니 녀석들을 대강 정리했다고 이 녀석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알아서 알 줄 알았지 꼭 알려줘야 하는 줄 몰랐다. 그렇다고 일주일이나 지난 다음에 알아챌 줄은 몰랐다.
녀석의 얼굴에 핀 울긋불긋한 멍을 보고 선생들이 얼마나 난리를 피웠던지. 범인을 색출한다, 당연히 성엽 패거리다, 정학시켜야 한다 말이 많았지만 어느 순간 완벽하게 조용해졌다. 승현이 한마디 한 것 같은데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학생들은 아무도 몰랐다.
일주일이 지나니 멍의 붓기가 가라앉았다. 그래도 예쁜 얼굴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혜준은 멍에 잘 듣는 약을 알려주려다 지금까지 승현의 반응을 떠올리곤 혀만 찼다.
“고맙단 인사는 못 들을 줄 알았지. 반장이라서다.”
“뭐?”
“네가 다른 반 놈이었으면 신경 안 썼을 거라고. 그러니 걱정 마시지. 네놈이 나한테 빚진 건 하나도 없으니.”
“내가 처리할 수 있었어!”
“아아, 나도 안대도?”
“빈정거리지 마!”
녀석이 다혈질인건 처음 알았다. 원래 성격인데 숨기는 걸까, 혜준만 보면 변하는 걸까. 평소의 모습으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녀석은 화르르 불타올랐다.
‘어이쿠, 잘못하면 데이겠네.’
“빈정거린 적 없다.”
“그럼 그 태도는 뭐야! 네놈이 쓸데없이 나서는 바람에 내 입장만 난처하게 됐어!”
“뭐? 그 놈들이 또 해코지 해?”
“사람 말을 뭐로 듣는 거야! 차라리 해코지하는 게 나아!”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녀석은 새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대체 혜준이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누가 뭐라고 하디?”
“내가, 내가 네 놈 여자라고 한다!”
녀석의 얼굴이 급작스레 빨개졌다.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금세 창백해졌다가 순식간에 피가 몰렸다가, 참 신기한 녀석이었다.
‘내 여자라고? 글쎄, 이런 여자 필요 없……지 않을 지도. 이놈이 여자라면 한번쯤 흥미를 가졌을지도 몰라. 으윽, 무슨 생각이냐, 윤혜준!’
“그 정도 소문 갖고 난리냐?”
“네, 네놈 때문에……!”
“스톱. 별 거 아닌 이유를 대주마. 첫째,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둘째, 소문의 근원지를 알기 때문에. 셋째, 네놈의 게이설이 퍼진 건 하루 이틀이 아니기 때문에. 물론 네 귀에 들어간 건 처음인 것 같지만.”
“근원지? 누구지?”
볼수록 신기한 놈이었다. 소문을 낸 놈을 알기만 한다면 진짜 패 죽이기라도 할 기세였다. 다른 이유들에는 신경도 안 쓰다니. 그의 예상으론 마지막 이유에 제일 파르르 떨었어야 했다.
“알면?”
“죽이겠어.”
머리를 긁적였다. 참으로 처치 곤란한 놈이었다.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죽이겠다는 말을, 그 의미를 아주 잘 알면서 무분별하게 써먹다니. 게다가 그가 가장 혐오하는 말이 있다면 이 ‘죽인다’라는 말이었다.
녀석은 그가 정색을 하고 다가서는데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성엽이라도 이런 것은 불가능했다. 녀석은 정말 깡으로만 사는 놈 같았다.
“죽는다, 죽인다, 이 두 말, 내 앞에선 결코 하지 마라.”
“뭐라고?”
“그 의미가 뭔지 알만한 나이 아니냐? 어떻게 감히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길 수 있냐?”
“죽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하지만 난 죽일 수 있음 죽이겠어. 감히 나를 욕보이다니.”
“굉장히 예민하게 구는데, 네가 신의 아들이라도 되냐? 널 욕보이는 게 그렇게 용서할 수 없는 짓이야?”
“뭐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날 욕하는 인간은 누구든 가만 안 둬.”
“왜? 넌 네가 그렇게 소중한가?”
“소중해.”
“하!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다른 인간들이 눈에 안 뵈는 거였구만. 나르시시즘 환자였냐?”
찰나였지만, 혜준은 놈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는 걸 보았다. 실망? 아니, 그보다 더 무거운 감정이었다. 고통? 그보다 더 아픈 것처럼 보였다. 슬픔?
‘너, 슬퍼하는 거냐? 무엇 때문에? 왜?’
볼수록 놀라운 놈이었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한 평소 얼굴 그대로였다. 눈빛도 평소대로 무덤덤했다. 그와 싸우면서 오히려 감정을 가라앉혔다.
“신경 꺼.”
“벌써 세 번째 듣지. ‘상관 마, 너랑 상관없어, 신경 꺼.’ 넌 그런 게 좋냐? 아무도 널 건드리지 않고, 건드리게 허락도 안 하는 거? 네가 안 하니까 남이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 하냐?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지?”
“너,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지?”
“그래, 친구. 난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친구라도 부를 수 있는 사이도 아니도 단순한 같은 반 급우일 뿐이지. 하지만 너를 보면 참 신기해. 어떻게 그러고 살 수 있지? 넌 누구도 필요치 않다고 떵떵거리지만 위태로워 보여. 혼자에 익숙한 것 같지만 그게 깨질 날을 기다리는 것 같아. 있는 힘껏 자기를 죽이고 살면서 누구도 자기를 못 보게 한다고.”
“그래? 분석은 다 끝났나?”
열을 올릴 필요는 없었다. 녀석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사실이었고,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 성엽에게 맞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전혀 상관없는 녀석이라 집에 돌아가면 까먹는데도, 눈에 들어오면 신경 쓰여 어쩔 줄을 몰랐다. 왜 저렇게 위태로운지, 왜 저렇게 인간을 혐오하는지, 왜 아무도 그런 녀석을 파악하지 못하는지. 그저 재수 없는 녀석이라고 치부하며 누구도 그를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 승현도 거기에 만족하는 듯 했다.
‘근데 왜? 내 눈엔 그게 보이는 거지? 난 네 놈을 열심히 살피지도, 뒤꽁무니 쫓아다니며 파헤치지도 않았단 말이다. 근데 왜 내가 널 알아야 하지?’
처음 짝이 되었을 때, 혜준은 결심대로 승현을 무시했다. 승현 역시 그를 무시했기에 둘 사이에는 기묘한 타협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혜준은 승현을 관찰하고 있었다. 녀석의 집중력이 얼마나 높은지 그가 노골적으로 바라봐도 꿈쩍을 안 했다. 덕분에 녀석을 쳐다보는 걸 스스로 깨달아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입맛이 얼마나 쓴지 모른다.
녀석이 사람들을 대하는 걸 지켜봤다. 애들은 승현의 콧대가 높아 자신들 같은 서민층과는 상종을 않는다고 평했다. 헌데 혜준이 보기엔 승현이 콧대가 높다거나, 애들을 깔봐서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그런 녀석이었다면 애들이 삼삼오오 모여 깔깔거리며 웃는 걸 부러운 듯 바라볼 리 없었다. 자기도 무의식중에 하는 짓인지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면 엄청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선생들의 특별대우에 으스댄다고도 했다. 허나 곁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선생들의 과도한 관심은, 애들의 호기심 이상으로 차갑게 거절당했다. 선생들이 눈을 밝히며 칭찬을 늘어놓으면, 혜준의 눈에는 녀석 주위에 쳐진 바리케이드가 보였다. 상대는 떠들게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도 듣지 않았다.
혼자인 것이 익숙해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문득 녀석의 손을 멈출 때, 녀석의 서랍에서 삐죽이 튀어나온 것이 피천득의 ‘인연’인 걸 알았을 때, 소리 없는 혼잣말을 하는 걸 보면 혼자인 걸 즐기는 사람 같지 않았다. 좁고 선이 가는 어깨가 그럴 때면 한없이 무거워 보였다.
‘그러니까 그게 왜 나한테 보이는 거냐고!’
“아아, 그래. 너나 나나 서로에게 상관하며 살면 안 되겠다. 앞으론 네 일, 무엇도 상관하지 않을 거다. 걱정 끄고 살아.”
공기가 무거웠다. 고체화되어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갑갑한 거냐. 귀찮은 일엔 신경 끄고 살기로 하지 않았냐. 한 번 도와줬다고 생색낼 생각도 없었고, 현동이 자식처럼 녀석과 친해졌다고 뻐길 생각도 없었다. 녀석에게 바란 것도 없었고, 녀석이 주려는 것도 없었다.
그는 승현을 혼자 남겨두고 교실로 돌아갔다. 옥상에 남겨놓은 녀석도, 선선해지는 바람도, 살갗을 태우는 따가운 햇볕도, 모두 잊기로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갑갑하냔 말이다!’
다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묘하게 외로워 보이는 녀석에게, 다신 시선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공했다.
수능이 끝난 이후, 승현을 볼 수 없었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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