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겁결에 손가락을 걸고 내일 또 오기로 약속했다. 내일 또……. 이 동네에서 무언가가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그런 식으로 생각한 내 자신이 우스워졌다. 나는 나다. 누구보다도 음험하고 형편없다. 기대하지 마, 아무것도. 고작 사는 집이 바뀐 거 가지고 뭐가 달라지겠어. 힘주어 나를 타일렀다. 그럼에도 집에 오는 길에는 자전거가 여느 때보다 가볍게 굴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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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다. 엄마는 여름 방학 들어서 생긴 일을 아직도 신경 쓰는 것 같다. 내가 아직 그 일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거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그런 일로 상처를 받다니, 인정할 수 없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에는 조금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은 마음이 넓은 편이라 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한다. 나는 그럭저럭 우등생 축에 들어서 선생님의 신뢰도 두터운 편이었고 부모님도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남몰래 도시나리를 괴롭혔다. 얼마 전에는 처음으로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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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 마음은 조금씩 조금씩 버석버석 말라 가고, 보풀이 일고, 뭘 해도 재미가 없고, 학교에 가는 게 고통스럽고, 엄마가 피아노 가르치는 소리조차 듣기 싫어졌다. 목이 바싹 마른 채로 물 없는 사막을 걷는 것 같았다. 물을 마시고 싶다. 차고 맑은 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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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는 학교 가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학원도 다닌다. ‘차이’란 말을 아는 건 단지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원에서는 아는 놈이 대단하다. 잘하는 놈이 존경받는다. 그건 어쩌면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이런 식으로 말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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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건반 위를 달린다.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엘리제를 위하여, 엘리제를 위하여. 이 순간 나는 행복하다. 에이타를 위하여. 누군가를 위해 좋아하는 피아노를 치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다니!
--- p.107
“노숙자 아저씨들도 일을 해. 하지만 아파트 같은 거 빌릴 만한 돈, 어지간해서는 모을 수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노숙자는 대낮부터 뒹굴거리기나 하고 일할 의욕도 없다고 지껄이지.”
--- p.118
“에이타는 바보가 아냐. 노사가 그랬어. 남보다 천천히 걷는 것뿐이래.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대. 난 꼭 걔를 지킬 거야.”
난 할 말을 잃었다. 천천히 걷는 것뿐. 그 말이 마음을 찌른다. 도시나리도……. 나는 도시나리가 굼뜨다고 녀석을 바보 취급해 왔는데.
--- p.122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숲에서 얼마나 마음이 차분해졌는가 하는 거다. 거기 드나들면서 여러 가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이나마 나 자신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거 모를 테지. 그래, 난 알고 있었다. 엄마 아빠는 이해 못 할 거라는 걸. 그래서 숲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거다.
--- p.129~130
나는 이제 엄마 아빠를 잘 모르겠다. 상냥한 엄마, 이해심 많은 아빠,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다. 엄마 아빠는 “너 좋을 대로 해라.” 하고 말하면서도 반드시 어느 길을 가리킨다. “이 길을 가면 좋을 것 같은데, 가즈키, 넌 어떻게 하고 싶니? 결정은 네 몫이야.” 지금까지 부모가 가리킨 길을 내가 선택한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언제부턴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진실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게 교활한 내가 해 온 일이다.
--- p.131
“나 있지, 사립 입시 관두고 여기 중학교 갈 거야. 그러니까 내년 봄에 학교에서 만날 수 있어.”
그래, 난 이 동네 학교에 갈 거다. 나는 유카를 똑바로 보았다. 유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직 한 사람 몫을 못 해. 그러니까 학교에 가야지. 그동안 재능 없다고 핑계를 대면서 계속 도망쳤거든. 그런데 사실은 누군가가 인정해 주기 바랐다는 걸 알았어. 노사가 가르쳐 줬어.”
--- p.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