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 길지 않다. 100년 살기도 쉽지 않다. 지금 우리는 종착역을 향해 논스톱으로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 있다. 우리 손에는 편도 티켓 한 장뿐이다. 중간에 내릴 수도 없고, 다른 기차를 갈아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여정을 내 뜻대로 최대한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저자 프롤로그」중에서
부처님께서는 최후의 순간에도 제자들에게 뜻을 세우고 이를 위해 매진하라고 당부했다. 부처님은 앞날이 보장된 왕위 계승자였다. 왕좌를 포기하고 중생 구제에 나선 부처님은 일생을 구도자요, 실천가의 삶을 살았다. 만약 부처님이 자신이 세운 뜻을 중도에 포기하였다면 인도의 한 소왕국의 왕으로 살다가 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끝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그 길로 매진한 끝에 세인이 우러러 받드는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 되었다.
---「1. 왕위 계승 포기, 구도자 길 걸은 석가모니」중에서
그가 만약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힘 있는 권력자에게 줄을 대 향촌의 벼슬아치로 살았다고 치자. 그랬다면 그는 ‘낭만 가객’의 명성을 후대에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백 년도 못 사는 인생에서 보면 그는 결코 루저가 아니었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정승을 몇 차례나 지낸 이들은 이름 석 자 남기지 못했지만, 내 뜻대로 산 그의 이름은 백세, 천세에 길이 남을 것이다.
---「2. ‘술 한 잔에 시 한 수’, 방랑시인 김삿갓」중에서
그는 배우고 익힌 것을 몸으로 실천한 참 선비였다. 대학자 율곡 이이는 그를 두고 ‘백 세의 스승’이라고 극찬하였다. 1707년(숙종 33)에 단종이 복위되자 그는 사헌부 집의(執議)에 추증되었다. 다시 1782년 정조는 그를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청간(淸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높은 벼슬을 하진 못했으나 그의 삶을 어찌 실패한 삶이라고 하겠는가. 오히려 그의 삶을 유방백세(流芳百世·꽃다운 이름을 후세에 길이 전함)라고 해야 옳지 않겠는가.
---「3. ‘단종 폐위’ 맞서 보던 책 불태운 김시습」중에서
강릉의 교산(蛟山)은 산세가 이무기[蛟]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허균은 이곳의 지명을 따서 자신의 호를 교산(蛟山)이라고 지었다. 교산 바로 앞 바닷가에는 교문암(蛟門岩)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신유년(1561년) 어느 날, 이무기가 그 바윗돌을 두 동강으로 깨뜨리고 떠났다고 한다. 이무기는 바위 밑에 엎드려 때를 기다렸지만 끝내 용이 되지 못했다. 어쩌면 허균은 뜻을 펴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자신의 삶을 예견하고 그런 호를 지은 것은 아닐까.
---「4. ‘세 차례 유배, 여섯 차례의 파직’ 허균」중에서
이탁오는 중국 역사 교과서에 진보적 사상가로 소개돼 있다. 그는 1984년 인민일보와 중국 공산당 중앙연구원이 합작하여 평가한 ‘중화영걸록(中華英傑錄)’ 82인에도 포함됐다. 이탁오는 20세기 들어서도 사회주의 중국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한때 금기의 인물이요, 이단자로 평가받던 그였다. 이탁오의 묘비에는 ‘일대 종사(一代 宗師) 이탁오선생지묘’라고 적혀 있다. ‘일대 종사(一代 宗師)’는 ‘한 시대의 으뜸가는 스승’이란 뜻이다.
---「5. “50 이전의 나는 한 마리 개였다” 이탁오」중에서
후미코의 짧은 생은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어려서는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사회에서는 무적자와 여자라는 이유로 가혹한 차별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삶을 거부하거나 비관하기는커녕 이를 딛고 일어서서 기존 체제와 맞섰다. 자신이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의 불법적 조선 통치를 비판하였고, 일본 사회를 옥죈 천황제의 불법성을 온몸으로 고발하였다. 한눈에 반한 조선 청년 박열을 위해서는 죽음도 같이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감옥에서조차 그녀는 자신이 세운 뜻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불과 23세에 불꽃같은 삶을 자살로 마감하였다.
---「6. 불온한 조선 청년을 사랑한 가네코 후미코」중에서
철저한 채식주의자이자 실천가였던 그는 백 살이 되자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스스로 곡기를 끊었다. 아내 헬렌 니어링과 함께 펴낸 책 이름처럼 그는 ‘조화로운 삶’을 살았다. 1983년 8월 24일 아침, 그는 침상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노래를 조용히 읊조렸다.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그러고는 평생의 동지이자 아내 헬렌 니어링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삶을 마쳤다.
---「7. 행동파 경제학자, 실천적 생태론자 니어링」중에서
소로우는 한동안 초월주의자 에머슨의 아류 정도로 평가되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들어 환경운동이 본격적으로 일면서 그가 쓴 『월든』과 함께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소로우의 생일인 7월 12일을 전후해 월든 호숫가에서 매년 미국 소로우 학회가 열리고 있다. 매사추세츠 주 정부는 월든 호수를 주립 보존공원으로 지정하였으며, 민간에서는 호수로부터 반 마일(약 804m) 이내 숲에는 상업 시설이 들어서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하버드대의 문학 생태학자 로렌스 뷰얼은 소로우를 생태학적 삶의 전범이요, 환경수호 성인(聖人)으로 재평가하면서 월든을 ‘미국 제일의 성지’라고 할 정도다.
---「8. 하버드대 출신의 통나무집 ‘자연인’ 소로우」중에서
그는 스승의 삶을 본받아 뜻을 세운 후 평생 그 뜻대로 살고자 노력했다. 굽이굽이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늘 외롭고 핍박받는 이웃들의 든든한 언덕이 돼주었다. 그가 일군 ‘한살림’은 생명을 살리고 지구를 지키는 버팀목이 되어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으로 성장했다. 그의 빈소에는 그 흔한 훈장 하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지성으로, 원주의 정신적 기둥으로 후세의 추앙받고 있다.
---「9. 운동권 출신 생명·협동조합 운동가 장일순」중에서
“60의 고갯마루에 서서 돌아보면 나는 평생을 중뿔난 짓만 하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가를 꿈꾸던 녀석이 고시 공부를 했다는 자체가 그랬고, 『이상전집』이 그랬고, 『친일문학론』이 그랬고, 남들이 잘 안 하는 것만 골라가면서 했던 것 같다. 타고나기를 그 꼴로 타고났던지 나는 지금도 남들이 흔히 하는 독립운동사를 외면한 채 (일제) 침략사와 친일사에만 매달리고 있다... 권력 대신 하늘만 한 자유를 얻고자 했지만 지금의 나는 5평 서재 속에서 글을 쓰는 자유밖에 가진 것이 없다. 야인이요, 백면서생으로 고독한 60년을 살아왔지만 내게 후회는 없다. 중뿔난 짓이어도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다면 내가 산 자리가 허망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0. 밤농사 지으며 ‘친일파’ 연구한 임종국」중에서
국내에는 성공한 기업인이나 자본가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육영사업에 뜻을 세워 거금을 투자하고 혼신의 정열을 바친 사람은 드물다. 아직도 국내 사학재단의 대다수는 교육사업을 명예와 돈벌이 사업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달랐다. 돈을 쓰는 자세, 교육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다. 그가 아니었으면 민사고와 같은 형태의 학교는 이 땅에 등장하지 못했다. 옹고집과 뚝심 하나로 그는 자신이 세운 뜻을 끝내 관철시켰다. 그의 자서전 제목은 『20년 후 너희들이 말하라』. 그의 말대로 20년 후에는 이 땅에도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2022년 6월 26일 그는 95세로 타계했다.
---「11. 우유 팔아서 ‘민족사관고’ 설립한 최명재」중에서
일찍이 산 생활을 경험한 그는 끝없는 자유를 갈구하였다. 세속의 문명을 거부하고 힘들게 살면서도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기에 끝내 자유와 맞바꾸지 않았다. 때론 야생마처럼, 때론 아이처럼 자유인의 삶을 끝까지 추구하였다. 큰아들 인효에 따르면, 그는 ‘만족’이라는 단어가 부족하리만큼 자연 속에서의 생활을 좋아하고 만족했다고 한다. 그래서 임종 역시 병원이 아니라 산속의 절을 택했다. 한평생 그는 자신의 뜻대로 글쟁이, 철학자, 방랑자, 그리고 자유인으로 살다 갔다.
---「12. 자유로운 삶 살다간 ‘농부 작가’ 송성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