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남들과는 다른 시간을 살았다. 남들은 어떻게 살아왔나? 저들은 자본주의의 초석을 놓는 데 한 세대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랬기에 노동계급의 첫 세대에게 성장의 과실 따위는 완전히 남의 이야기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이들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세상에 대한 꿈에서 출구를 찾아야 했다. 그것은 여전히 꿈일 뿐이었지만, 자본가들에 맞서 그들을 ‘사람’으로 서게 해줄 존엄의 표지였다.
--- p. 14
뜻밖에도 ‘민주’정부 10년 뒤에 남은 것은 정반대 광경이었다. 87년의 여진을 이어받은 ‘민주’세력과 민주노조운동만으로는 민주화 다음의 과제에 착수조차 하기 힘들다는 게 드러났다. 아니, 역전 불가능하리라 믿어온 민주화 성과조차 흔들릴 수 있음이 드러났고, 2016-17년 촛불항쟁은 이런 역사의 퇴행을 막아보려는 몸부림이었다. 87년의 성취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려는 과감한 시도가 아니라 말이다. 그리고 이들 뒤에서 좌절과 환멸로 무장한 채 사회에 나서는 또 다른 이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교리를 따르는 것만이 정답이라는 확신을 주입받은 첫 세대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들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무렵 신자유주의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함께 불안과 격동의 시기에 돌입했다. 투기를 통한 기회의 문이 닫혔고, 불안정 고용의 정글만이 이들을 맞았다.
--- pp.15~16
첫째, 5월 투쟁을 거치며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전개될 민주화의 폭과 깊이가 확정됐다. 군부독재가 만들어놓은 체제와 완전히 단절하는 민주화의 길은 닫혔다. 오히려 기존 체제에 ‘적응’하는 길만이 당장은 민주화의 유일한 경로로 남았다.
--- p.38
이런 ‘추격의식’을 통해 우리 사회에는 어느 자본주의 사회보다 빠르고 깊게 경제주의가 뿌리내렸다. 상층 계급을 추격 대상으로 보는 한, 계급 사이에 분명한 선이 그어질 수 없다. 본래 계급이란 거리두기에서 비롯된다. 노동자들이 자본가에게 거리를 둘 때, 비로소 우리는 ‘노동계급’을 말할 수 있다. 이 거리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계급의식’이 형성된다. 그러나 추격 상황에서 거리란 좁혀야 할 무엇일 뿐이다. 중산층에게 부유층은 미래의 자기이고, 노동자들에게는 중산층이 그렇다. 그럴수록 상층 계급의 사고 · 행동양식은 쉽게 아래로 퍼져나간다. 이게 압축 성장 시기에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 p.67
중산층 이데올로기가 능력주의의 한국적 형태인 ‘고시’주의를 취한다는 점, 구명선 의식과 이중 노동시장이 만나서 정규직 · 비정규직 격차가 극심해졌다는 점, 공공부문이나 대기업의 관료형 조직에서 서구와는 다른 전통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 등 때문에 한국 사회가 좀 별나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서구에서 신자유주의 시대를 지탱했던 사회세력 간 구도와 한국 내 사회세력 간 구도가 크게 다르다고 할 수는 없다. 중산층을 그 아래와 단절시키고 위와 결합시키는 동맹의 정치가 다만 ‘한국적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뿐이다.
--- p.79
사회주의란 이렇게 사회적 자유를 통해 자유, 평등, 우애라는 근대의 약속을 하나로 꿰뚫으며 실현하려는 이념이자 운동이다. 사회주의가 역사 속의 숱한 실패와 오류에도 불구하고 재발명돼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회주의의 진짜 목표인 사회적 자유야말로 개인적 자유의 복고 운동(이름 하여 ‘신자유주의’)이 세상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가 고개를 돌릴(성서의 메타노이아, 즉 회심) 방향이 어디인지 가리켜주기 때문이다.
--- pp.148~149
재벌권력을 대체할 사회권력을 육성하려면 ‘새로 재구성된’ 공공이 필요하다. 새 공공이란 광장의 목소리에 따라 움직이는 공공이다. 예컨대 이런 구상을 해볼 수 있다. 정부 안에 국유 부문을 관리할 새로운 기구를 설립한다. 이 기구는 기존 경제부처로부터 독립해 시민사회 내 다양한 집단의 대표자로 구성되며, 국회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다. 이 기구는 산업은행 지분, 국민연금 지분을 통합 관리하면서 이에 따른 경영 개입을 지휘한다. 사회이사 중 중앙정부 대표자는 바로 이 기구에서 파견된다. 이런 기구가 설치된다면, 국민연금이 청와대와 삼성 재벌의 밀실 거래에 동원되는 일 따위는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 p.172
사실 그 전부터 조짐을 보이기는 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 동화와 백일몽, 광고 영상 같은 인류의 상징 세계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것은 두 초거대 재벌, 일론 머스크와 제프 베조스다. 이 둘은 모두 더럽혀지고 쓸모없게 된 지구를 벗어나 새로운 거주 행성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개척자를 자처한다. 지구를 망치고 나면 이곳을 떠나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더 나은 삶을 열 수 있다는 야망의 상징이다. 그런 삶을 향해 떠날 자들이 얼마나 소수일지, 아니 아예 그런 여행이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달리 말하면, 이 둘은 정확히 돌봄의 반대를 표상한다. 또한 자본주의 역사의 정점이기도 하다. 이들은 지금이라도 지저분하고 힘들고 고뇌 어린 돌봄 쪽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한다.
--- p.218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조합은 기후변화 대응에 무력하고, 자본주의 틀 안에서 기후변화에 대응하려 하면 민주주의가 위험에 빠진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 즉 민주주의와 기후변화 대응의 조합을 성사시키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는 적어도 논리상으로는 명확하다. 그것은 인간사회가 자본주의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조건이다.
--- pp.244~245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작년 말 한 유럽 매체와 진행한 대담에서 기후위기에 대응하려면 “전시 동원 상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www.euronews.com. 2019. 11. 18). 전시 총동원 방식으로 경제를 운영해야만 기온 상승 속도를 늦출 정도로 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학자가 “전시”라 말할 때 염두에 둘 만한 전쟁은 십중팔구 제2차 세계대전이다. 이때 미국은 유럽과 태평양, 두 전선에서 싸우면서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 연합군 진영의 병기창 역할을 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에 미국이 매년 GDP의 1/3을 전쟁 수행에 쏟아부었다고 평가한다.
--- p.250
같은 이야기를 도시를 놓고도 할 수 있다. ‘15분 도시’ 같은 구상을 추진해왔기에 도보나 자전거, 대중교통이 이미 중심 이동 수단이 된 도시와 그렇지 않은 도시, 둘 다 최악의 기후위기가 닥치면 예외 없이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다. 그러나 전력난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 시민의 품격을 최대한 유지하며 버틸 수 있는 도시와 그렇지 못한 도시는 확연히 구별될 것이다. 어느 쪽이 전자이고 어느 쪽이 후자일지는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빤하다.
--- p.286
영국에서 산업자본주의가 탄생해 유럽, 북미 등 세계 곳곳으로 퍼지던 19세기는 자본주의 문명의 봄이었다. 이 무렵 산업사회는 마치 꽃봉오리들이 처음 피어올라 막 세상을 향해 열리려 할 때처럼 수많은 미지의 가능성을 내포한 것처럼 보였다. 인생에 비유한다면, 청년기라고나 할까. 뒤이은 시대, 즉 장마철의 모진 비바람과도 같았던 20세기 초의 대혼란을 뚫고 등장한 한 세월은 자본주의 문명의 여름이었다. 여름은 봄에 싹을 틔운 생명이 한창 끝없이 뻗어나가는 계절이다. 이 시기 자본주의가 꼭 그러했다. 한때 나락에 빠지는 줄만 알았던 산업자본주의는 전례 없는 성장의 질주를 벌였다. 자원의 소비와 총산출량 그리고 그것이 인간과 자연에 끼치는 영향 모두 확장 속도를 배로 높였다.
--- pp.306~307
바로 이 여름의 끝자락에 한국은 번영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극히 예외적인 성공 사례였다. 자본주의적 권력 독점의 가장 벌거벗은 형태에다 국가사회주의의 일부 요소들까지 버무린 돌진적 실험을 통해 이뤄낸 성공담이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실험을 주도한 정권을 신화의 주인공마냥 떠받드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이런 종류의 실험이 낳을 수밖에 없었던 심각한 후유증에 항거하고 있다. 아무튼 한국은 대단히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한여름의 열기에 함께 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여름은 이제 끝나버린 것 같다. 나름 짧지 않은 시간을 명멸했던 이 여름의 여진도 이제는 생명력을 다해간다.
--- p.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