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이 발생한 전염병과의 전쟁이나 반인권 범죄로 고소당한 외국 국가원수의 구인 요청에 대한 반발, 불법 이민을 차단하기 위한 장벽의 강화나 컴퓨터 바이러스를 무력화하기 위한 전략 같은 현상들이 지니는 공통점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이 소식들을 계속해서 의학, 법률, 사회정책, 기술정보라는 해당 분야의 개별적인 관점으로 분리된 영역 안에서만 읽는다면 공통점을 발견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 특수한 언어들을 비스듬한 각도에서 관찰하며 동일한 의미의 지평으로 환원할 수 있는 해석적 범주 안에서 고찰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책 제목에 명시되어 있듯이 나는 이 범주를 ‘면역화’라는 영역에서 발견했다.
--- p.7
오늘날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오랫동안 단순히 ‘불가피한’것에 지나지 않았던 전염 자체가 아니라 제어나 제약이 불가능할 정도로 삶의 모든 생산 구조를 파고드는 전염의 ‘확산’이다. 어떤 불확실한 위험 상황을 언급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상황을 식별하는 단계로 접어드는 순간 이 범주는 고유의 함의를 드러낸다. 곧장 명백해지는 것은 앞서 언급한 각각의 현상에서 이 면역화의 범주가 경계 이탈의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전염병이 개인의 몸을 위협하든, 폭력적 침략이 정치공동체를 위협하든, 바이러스가 전자기기를 위협하든 간에 불변하는 요인으로 드러나는 것은 위협의 위치다. 위협은 항상 내부와 외부, 고유한 것과 생소한 것, 개별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경계’에 머문다.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개별적이거나 집단적인 몸에 침투한 뒤 그것을 변질시키고 변이와 부패를 조장할 때 이 분해의 역동성을 가장 잘 표상하는 용어는 ‘전염’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생물학, 법률, 정치, 소통의 언어들이 교차하는 곳에서 활용되는 용어가 바로 ‘전염’이다. 줄곧 건강을 유지하며 확실성과 정체성을 보존하던 것은 이제 그것을 파멸로 이끌지도 모를 ‘전염’에 노출된다. 물론 이러한 유형의 위협은 모든 형태의 개인적인 삶을 비롯해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에 고유한 구축적인 요소다. 하지만 면역화의 요구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면역화를 심지어 사회체계의 상징적이고 물리적인 회전축으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은 언제부턴가 전염성의 표류 현상이 띠기 시작한 가속화와 보편화의 성격이다.
--- p.9
‘몸’의 의미론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역동적인 면역 메커니즘이 개인적이거나 사회공동체적인 몸의 점진적인 소외 혹은 탕진의 과정과 직결된다고 보는 아주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생명정치의 양태는 새로이 조명되는 ‘몸’의 핵심적인 역할을 중심으로 구축된다. ‘몸’이야말로 정치와 생명/삶의 관계가 가장 즉각적으로 성립되는 영역이다. ‘몸’이 전제되어야만 생명을 파괴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뿐 아니라, 변화를 위해 스스로를 뛰어넘으려는 생명체의 본질적인 성향으로부터 생명 자체를 보호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이때 삶은 마치?생존을 위해? 몸이라는 울타리 안에 틀어박혀야 할 것처럼, 그런 식으로만 보존되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의하자? 이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몸이 퇴보와 붕괴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실은 병/악의 침투를 오히려 가장 직접적으로 실험하는 것이 ‘몸’이다. 울타리가 중요해지는 이유는 오히려 다름 아닌 외부의 위험이 몸의 보호에 필요한 경보와 방어의 메커니즘을 발동시키기 때문이다.
--- p.28
사실상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권리는 더 이상 권리라고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실’로만 인지될 것이다. 다시 말해, 권리가 없는 자들이 처한 상황에서 권리를 지닌 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특징이나 권리의 다름 아닌 면역적인 의미, 즉 특권 또는 사적인 성격을 잃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본질적으로 사적인 것을 공통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혹은 어떤 식으로 특권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공유할 수 있는가? 베유는 이렇게 토로한다. “지적으로 어두워진 이 시대에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모두의 입장에서 특권을 누릴 수 있는 동등한 권리, 본질적으로 특권적인 것들에 대한 권리를 요구한다. 이는 일종의 부조리하고 저속한 청구다. 부조리한 이유는 특권이 원래 불평등한 것이기 때문이고, 저속한 이유는 그것을 바랄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 p.48
법적 권리를 위협하는 것은 여하튼 폭력이 아니라 권리의 ‘바깥’이다. 즉 ‘법적 권리의 바깥’ 같은 것이 실재한다는 사실, 법적 권리가 모든 것을 포괄하지 않으며 권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위협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폭력이 ‘법 바깥’에 있다는 통상적인 표현은 문자 그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폭력은 고유의 정당성을 폭력의 내용이 아니라 위치에서 취한다. 폭력은 법 바깥에 ‘머무는 이유가 있어서’ 법적 권리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법 바깥에 ‘머무는 한’ 충돌한다.
--- p.57
건강한 부위와 병든 부위의 기능 교환을 통해 전개되는 유기체의 자기조절 과정을 언급할 때 주목해야 할 것은 더 이상 객관적인 차원에서 시도되는 긍정성과 부정성의 단순한 저울질이 아니라, 부정성 자체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관건은 더 이상 ‘측정’이나 ‘판가름’이 아니라 힘의 강세와 약세가 뒤섞이거나 중첩되는 현상이다. 강세의 약화가 약세를 강화하는 데 쓰이고 약세의 강화가 강세를 약화하는 데 쓰인다. 이때 부정성은 긍정성과 균등해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스스로의 무력화를 위해 생산적으로 변한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사실상 아도르노나 하이데거가 정반대의 입장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20세기의 인류학은 결코 휴머니즘의 계승 또는 고갈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의 전복이다. 20세기 인류학이 본연의 핵심 문제로 주목했던 것은 스스로를 극복하는 인간의 인간성 증대가 아니라 인간을 자신과는 다른 타자 혹은 스스로의 ‘부재하는 중심’과 관계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주름 또는 상처다.
--- p.159
바로 이 지점에서 인류학은 정치학으로 거듭난다. 다시 말해, 인류학의 원천적으로 정치적인 어조가 여기서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한다. 보완의 공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면역장치의 기능적인 역할을 취득하거나 드러낸다. 관건이 다름 아닌 면역 기능이라는 점은, 인간을 위협하는 자연적인 위협 앞에서 다양한 형태의 정치가 수행하는 것이 보호-보증의 역할이라는 사실과 이러한 위협에 명백하게 공동체적인 성격이 부여된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공통성의 과다야말로 정치가 인간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봉쇄해야 할 위험이다.
--- p.183
생명과 정치의 상호소속성은 생명정치에 과연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생명을 제외하는 식으로 포용하는 주권 권력의 상흔 속에서는 발견되리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답변을 오히려 주권의 범주 자체가 면역화의 범주와 시대적으로 맞물리며 면역화에 자리를 내어주거나 적어도 함께 뒤섞이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명과 정치의 조합이 실행되는 과정의 일반적인 범주는 다름 아닌 ‘면역화’다.
--- p.261
질병도 건강처럼 고유의 규율을 지닌다. 단지 이 규율은 변화할 줄을 모른다. 새로운 규율을 생산해낼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질병의 규율은 규율지향성을 지니지 않는다. ‘벌거벗은 생명’은 규율의 대상 또는 결과가 아니라, 규율의 무변동성이 실현되는 장소다. 그것은 무법 지대나 비정상정인 것이 아니라 - ‘법’이나 ‘정상’의 반대가 아니라 - 엔트로피적인 비-규율지향성의 지대다.
--- p.269
사회는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의 몸과 전적으로 유사한 형태의 신체를 지녔을 뿐 아니라 인간과 한 몸을 형성하며 유기적으로, 신체적으로 기능한다. 사회는 생명을 보호하고 보존하려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성향과 무관한 어떤 고차원적인 실체가 아니라 동일한 성향을 우선적으로 충족시키면서 사회 자체의 생존이라는 형태로 최대한 활성화하는 몸에 가깝다. 사회만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라 인간도 사회를 닮았다. ‘개인만큼 고유의 차이점에 의해서만 통합되는 수많은 파편으로 사실상 분리되어 있는 존재도 없다. 개인 자체는 공동체에 참여하는 주체라기보다 오히려 무한히 복수적인 하나의 공동체에 가깝다.’
--- p.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