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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의 원주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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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의 원주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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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1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167쪽 | 176g | 125*200*10mm
ISBN13 9791191262933
ISBN10 1191262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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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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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굽의 신발을 신어도
곧게 걸을 수가 없어서 나는
뾰족뾰족 무한다각의
원주율을 가지고 있어서
그 꼭짓점들 중 어떤 것들은
무디게 갈아내고 싶어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지만
캄캄한 밤들만 진열되어 있어서
조금씩 벌어질 수밖에 없는미래들과
더 먼 미래들
나는 쓸모없는 모서리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 「치마의 원주율」 중에서


아빠 기저귀를 갈아주는데
항문에서 찌그러진 달덩이가 굴러 나왔다
파내도 파내도 계속 나오는 달덩이
아빠는 점점 가늘어졌다

아빠 속을 다 파먹은 벌레들이 살이 올라
달덩이 흉내를 내며 아무렇게나 빛났다
가난도 아빠를 파먹고 무성하게 자랐었는데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일수록 부지런히 자란다

아빠가 헝겊 인형이라면 배를 가르고
가증스런 빛들로 가득 찬 아빠의 장기들을
과일칼로 세심하게 도려내고 싶었다
그 속엔 우리의 시간이 얼마나 들어 있을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평생 아빠에게 달라붙어 있던 허울 좋은 친절들과
가족들에게만 엄격했던 회초리들과 엿 같았던 고집들을
파내는 일, 아빠 똥구멍에서 병든 달덩이를 채굴하는 일
한때 생명의 기원이었을 아빠의 쭈글쭈글한 고환 아래가
축축하지 않도록 새삼스럽게 잘 닦아 주는 일

아빠는 하루에 여덟 번씩 기저귀를 갈았다
아빠가 가벼워질수록 내가 무거워져서 행복했다
---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중에서


없는 당신은 백목련 나무처럼
불쑥불쑥 발작하듯 꽃을 피워내

목련꽃처럼 튀어나오는 당신의 하얀 발
서늘하게 내 발등에 포개지는 밤
나는 없는 당신이 살던 집의 유리창들을
모두 깨 버리고 싶어져

당신이 부르던 나의 이름이
자꾸만 엇박자로 미끄러지며
후드득 발등을 관통해

없는 당신이 아예 없어지는 건 무섭지만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는 밤

창밖에 우두커니 매달려
나를 내려다보는 보름달 속에선
목련나무 가지 같은 당신 손가락들이
꽃잎을 밀어내고 있어

달 속에서 떨어지는 꽃잎들이
깨진 유리 가루처럼 반짝거리고
아무것도 잡을 수 없는 나는
그 먼 풍경들을 바라만 볼 뿐

없는 당신이
뜬소문처럼 나를 바라보며 지나가고 있어
--- 「없는 당신」 중에서


당신은
바람이 불면 생겨나는 사람

저쪽 끝에서 불어와 다시 저쪽 끝으로 사라지는
바람의 간격은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만큼의 거리

움직이는 모든 것들 속엔 바람의 기척이 있다
지금 막 짙어지기 시작한 나뭇잎들을 만지며 지나간
바람의 잔향이 맴도는 여기에서, 당신은
없는 모양으로 무질서하게 나타난다

내가 믿기만 하면 어디에나 생겨나는 당신
--- 「바람의 형태」 중에서


그런 경험 있나요?
주위의 모든 것들로부터 제외당하는 거요
아플 것 같다고요?
천만에요
생각보다 숨겨진 완충지대가 넓어서 아프진 않아요
다만 그곳이 물컹하게 후드득거리는 게
문제라면 문제일까요
예고 없이 내리기 시작하는 첫눈처럼 말이에요
우린 늘 예고 없이 제외되니까요
간격의 거리는 불안정해요, 완충지대처럼요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지만 그뿐이에요
우리 사이는 그래서 결코 따뜻하지 못해요
착지하지 못한 채 울렁거릴 뿐이죠
중력이 필요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네요
중력의 가벼움 때문에 내가 지워지고 있다는 생각
산발적으로 지워지며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
그러면서 이미 제외되고 있는 거죠
가까워질 수 없기로 결정되어 있는 거라고요
걱정이나 슬픔 따위는 집어치우고 온도만 생각하세요
더위와 추위가 교차하는 지점이요, 그곳에서
내가 제외되는 온도는 몇 도일지 알아내야 해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마주 보지 못해 아쉽다는 구차함들은
변명만 길러낸다는 걸 알잖아요
우리가 각각의 섬으로 떨어져 내리듯
첫눈이 내리는 오늘 아침
키우던 완충지대가 사라지고 있어요
나의 팔과 다리는 어디에 착지해야 할까요

나는 매일매일 제외되고 있어요
--- 「완충지대」 중에서


나를 사면 아기를 돌보는 노인을 드립니다
우린 모두 쓰고 남잖아요
그러니까 반품은 미덕이 아닙니다

약간의 수치심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야 더 세심하게 나뉠 수 있습니다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나를 팔아 보겠습니다
누구, 나를 사실 분 없나요?
나를 사면 강아지와 욕실과 검은 방과 지옥을
덤으로 드립니다

나를 사 가세요
원 플러스 원, 그리고 플러스 알파

나는 당신의 당신입니다
--- 「원 플러스 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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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리샤는 두 개의 혀를 가지고 있다(“나의 혀는 반은 공룡이고 반은 꽃입니다”, 「쓸모없이 중요한 말들을 중얼거린다」). 하나의 혀로는 청춘의 고통을 말하고, 다른 혀로는 그 고통에 감응하며 함께 응시해 주는 이들을 부른다. 고통의 풍경을 반복하고, 고통의 신열 속에 떠오르는 흐릿한 얼굴들을 끊임없이 소환하는 것. 시인이 “나는 만질 수 없는 당신들의/지나간 시간을 뜯어 먹으며/당신들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시인의 말」)고 고백한 까닭이 여기 있다. 하지만 아무리 가까이 다가간들, 그 얼굴은 흐릿하다. 흐릿한 것들은 우리를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든다. 거리가 좁혀지고 그 얼굴이 명징하게 보일 때, 우리는 그 얼굴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하여 자신을 투기投棄하는 시인을 만난다. “나는 죽어서 아버지의 악보가”(「나는 죽어서 악보가 되겠습니다」) 되고, “동그라미 속에 알을 배고/죽은 엄마를 낳”(「동그라미 속의 동그라미」)는 시인의 뒷모습이 그것이다. 응당 이와 같은 말에는 어떤 출렁거림이 뒤따른다. “밤새 얼음을 뒤집으며 들썩이는 파도 소리”(「외포리 여인숙」) 같은…. 시집 곳곳에 바다가 출렁이지만, 이 바닷속에는 고통이 갇혀 있고, 흐릿한 당신들의 얼굴이 갇혀 있고, 그것을 보기 위해 내던진 시인이 갇혀 있다. 때문에 이 시집을 읽는 일은 아프고, 저리다. 이 아픔에 공명되고 있음을 느낄 때, 어느새 우리의 혀도 두 개가 되어 있을 것이다.
- 김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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