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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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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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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8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364쪽 | 416g | 125*200*30mm
ISBN13 9791192333243
ISBN10 1192333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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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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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만 구하고, 하다가 죽으면? 고졸은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머리를 젖히며 웃었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보다 자극적인 웃음소리였다. 호프집 주인과 차에 오르려던 경찰이 우리를 보았다. 바닥에 흩어진 파편들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서 반짝였다. 고졸은 종이컵을 탁자 아래에 버리고 소주를 병째로 마셨다. 그는 영원히 해소할 수 없는 갈증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 그의 팔뚝에 나 있는 화살 문신이 땀에 젖어서 번들거렸다.
---「오늘」중에서

고졸은 약국에서 구충제를 사고 사우나로 갔다. 주머니 사정이 괜찮으면 고시원에서 지냈고 사정이 나쁘면 큰길의 끝머리에 있는 만화방이나 다방으로 갔다. 사정이 어중간하면 사우나에서 일주일 단위로 투숙하며 돈을 벌 때마다 한 주씩 기간을 늘렸다. 이날은 일당을 받은 날이었고 사정은 한동안 어중간함에서 유지할 수 있을 듯했다.
---「묻혀 있는 것들」중에서

남편은 작업지에 오기 전부터 두통과 토기를 느꼈다. 항바이러스제를 먹으면 몸에서 일어나는 증상이었다. 작업을 하려면 속이 든든해야 했으나 약 부작용이 심해서 토할 수 있었기에 허기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먹었다. 운이 좋아서 약 부작용이 없거나 덜한 날에도 작업지에는 분진과 냇내가 가득했고 농장에는 죽여야 하는 가축들이 많아서, 두통과 토기는 찾아왔다.
---「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중에서

영목은 피 묻은 손으로 심장 박동이 거세지고 있는 가슴을 짚었다. 허리 굽은 아버지와 팔소매에 피 묻은 동료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그 자신이 추하고 못나고 조그맣고 유해하고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위협받고, 소외당하고, 해를 입고, 피를 흘려도 마땅한 인간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식탁 위의 사람들」중에서

두목이 맥주잔을 떨어뜨렸고, 레게는 닭고기를 씹다가 멈추었으며, 켈로이드는 팝콘 그릇에서 손을 떼었고, 중년 여자는 피를 닦다가 눈이 동그래졌다. 실내에 있던 사람들이 머리털 없는 남자가 고통에 짓눌린 얼굴로 울부짖는 광경을 보았다. 그것은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짐승이나 괴생물체가 지르는 외침처럼 들렸다. 대부분 소리를 듣는 것이 무섭고도 불편했기에 시선을 거두었고, 다시금 먹고 마시는 행위가 이어졌다. 조교만이 도살당하는 양처럼 소리 내는 남자를 직시하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S대」중에서

관리관은 손실액이 많다고 투덜거렸다. 이곳에서 생긴 손실은 관리관이 다음 부임지로 떠나기 전에 자신의 돈으로 메워야 했다. 판매병은 말했다.
최근에 도둑이 많아지고 있다고.
---「검은 쥐」중에서

직원은 쓴침을 삼키면서 가방 지퍼를 열었다. 거기에 들어 있던 것들은 대부분 버렸지만 도끼는 남아 있었다. 동물에게 한 차례 휘두른 적은 있지만 사람에게 사용할 기회는 한 번도 없었던 도끼. 그는 도끼날을 감싸고 있던 고무 덮개를 벗겼다. 날이 시퍼레서 사람 목을 반쯤은 자를 수 있고 손목 발목은 단번에 끊을 만했다. 그는 도끼를 오른손에 쥐고 왼손 엄지로 날을 만졌다. 자신의 살갗이 종잇장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목록을 생각하며 눈을 지르감고 손바닥을 그었다.
---「매직」중에서

창가에 걸어 놓은 부채꼴 모양의 리넨 커튼이 미풍에 조금씩 흔들렸다. 눈으로 좀처럼 잡아내기 어려운 움직임이었다. 그는 이곳에도 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눈에 띄지 않거나, 저렇게 잘 보이지 않게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가나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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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눈을 감는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누군가는 드라마를 보고 누군가는 명품 사진이나 맛있는 음식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겠지. 그러면 나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창밖으로 흘러가는 구름이나 바람을 보고 있었다. 부끄럽다는 말도 무참하여 차마 할 수 없었다.

조영한 소설의 인물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고졸, 사장, 기사, 혹은 민머리, 남편, 아내. 그들에게 이름이 없는 것은 그들이 맞닥뜨린 비극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수나 영희라는 특정 인물에게만 닥친 비극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비극이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그건 이미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라고, 경제 규모 세계 10위, 1인당 국민소득 35,168달러의 대한민국에서 그런 비극이 흔할 리 없다고,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세계 최첨단 도시라는 한국에서 지하방을 빠져나오지 못해 홍수에 희생당한 일가족의 소식이 보란 듯이 뉴스를 도배하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이고, 조영한은 그 현실을 냉정하리만치 담담하게 우리 앞에 들이민다.

조영한의 ‘그들’, 이름없는 ‘그들’은 살기 위해 전염병에 걸린 가축들을 살처분하고, 자신들의 아이마저 처분할 수밖에 없다. 사는 일이 팍팍하여 생명을 죽인 죄의식을 느낄 수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외치는 대신 가만히 읊조린다. 옳고 그름 따위는 없다고. 원인과 결과만이 있을 뿐이라고. 우리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던 70년대는 얼마나 아름다웠는가! 일말의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은 21세기, 전태일의 후손들은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망자가 남긴 몇 푼의 돈으로 한 끼의 허기를 달랠 뿐이다. 조영한의 세상에 감상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어설픈 감상과 허위가 판을 치는 요즘 문학의 풍토를 거슬러 오르는 조영한의 소설을 읽고 생각했다. 이것이 소설이다. 그러나 다시는 읽고 싶지 않다.
-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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