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은 전체주의와 프로파간다에 대한 선견지명으로, 불유쾌한 사실들을 직면하는 것으로, 건조한 산문체와 굴하지 않는 정치적 견해로 유명하던 작가이다. 그런 그가 장미를 심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자나 공리주의자, 실용주의자나 또 아니면 그저 실제적인 사람이 과일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못 된다. 과일나무는 가시적인 경제적 가치를 갖고 있고 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산물―물론 그 이상이지만―을 내니 말이다. 하지만 장미 한 그루를―또는 그가 1936년에 복구한 이 정원의 경우처럼 일곱 그루를, 그리고 나중에는 더 많이―심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 p.27
그의 글에는 흉측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종종 공존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취재차 독일에 갔던 그는 보행자용 다리 근처에서 시신을 하나 발견했다. 그 다리는 슈투트가르트를 지나가는 강에 놓인 다리들 가운데 끝까지 폭파되지 않은 몇 개 중 하나였다. “죽은 독일 병사 한 명이 계단 발치에 드러누워 있었다. 얼굴은 밀랍처럼 노랬다. 가슴에는 누군가가 놓아둔 라일락 한 다발이 있었다. 사방에서 라일락이 피어나던 무렵이었다.”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그림 같은 장면이다. 노란 얼굴과 라일락, 죽음과 삶, 봄의 생기와 전쟁의 참상.
--- p.47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같은 작가라면 콩을 심고 은유와 잠언을 거두었을 법하지만, 이런 일지에서 오웰의 콩은 엄격하게 콩으로 자랐다. 즉 그는 그런 관찰이나 기록을 상상력의 도약판이나 공공연한 문학적 기초 공사로 삼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것은 사적인 성격이 없는 일지로, 발표하려고 쓴 것도 아니고 그의 감정적·창조적·사회적·신체적 삶의 기록도 아니다. 단지 그의 노동과 작업 계획을 담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무엇을 사고 무슨 일을 해야겠다는 식의 목록도 있는데, 너무나 단순하고 가까운 미래의 계획이라 다른 많은 일들이 실현 불가능할 때에도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들이었다.
--- p.66
정원은 항상 생성의 장소이므로 정원을 만들고 관리하는 것은 희망의 몸짓이다. 지금 심는 이 씨앗들이 싹 터 자라고, 이 나무가 열매를 맺으리라는, 봄이 오리라는, 그래서 뭔가 수확이 있으리라는 소망 말이다. 그것은 미래에 깊이 관여하는 활동이다.
--- p.72
오웰은 자신이 글로써 반대한 것들, 즉 권위주의와 전체주의, 거짓말과 프로파간다(그리고 대충 넘어가기)로 인한 언어와 정치의 타락, 정치적 자유의 근간인 프라이버시의 잠식 같은 주제들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 힘들로부터, 그가 긍정적으로 추구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평등과 민주주의, 언어의 명확성과 의도의 정직성, 사생활과 그 모든 즐거움과 기쁨, 정치적 자유와 어느 정도 그 기반이 되는, 감독과 침범을 받지 않는 프라이버시, 그리고 즉각적 경험의 즐거움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 긍정적인 것들을 굳이 반대되는 것들로부터 유추할 필요는 없다. 그는 긍정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많이 썼다. 그런 에세이들이 그가 쓴 글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그렇지 않은 다른 작품들 곳곳에서도 그는 삶을 살아갈 만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썼다. 그의 가장 암울한 글에도 아름다움의 순간들이 있다. 그의 가장 서정적인 에세이들도 실제적인 문제들과 드잡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 p.73
이 모든 것의 저변에는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반혁명적이고 부르주아적이요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라 보며 그런 것들에 대한 욕망은 근절하고 경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실용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자칭 혁명가들은 오직 물량화할 수 있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보다 마땅히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으로 만족해야 하고, 현실적으로 어떠한 것보다 마땅히 어떠해야 할 것에 맞추어가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빵과 장미’에서 장미란 단순히 더 많은 것이 아니라 좀 더 손에 잡히지 않는 섬세한 무엇을, 로즈 슈나이더먼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저 생존이 아니라 삶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삶을 살 만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어느 정도 측량 불가, 예측 불가하며 사람마다 다르다는 주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미는 또한 주관성과 자유와 자기결정권을 뜻한다.
--- pp.127~128
『1984』는 잠재적인 위험뿐 아니라 현재에 대한 경고이며, 오웰이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에 대한 옹호였다. 이번에 책을 읽으며 나는 그 점에 주목했다. 경고는 예언이 아니다. 경고는 우리에게 선택이 있음을 전제하고 그 결과에 대해 주의를 주는 것인 반면, 예언은 고정된 미래를 기초로 작동한다(물론 소설은 현재의 잔혹함과 위험에 대한 것인 동시에, 그 논리적 귀결이 어떠할까에 대한 것이다). 유토피아 및 디스토피아에 대한 소설가이자 사색가로서, 옥타비아 버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가능성들을 알아보고자 앞을 내다보고 경고하려 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희망의 행위이다."
--- p.346
오웰의 주목할 만한 성과는 전체주의가 자유와 인권뿐 아니라 언어와 의식에까지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다른 누구도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적시하고 묘사한 것이다. 그의 작업이 너무나 강한 설득력을 지녔으므로, 그의 마지막 작품은 현재까지도 그림자를, 아니 봉화의 불빛을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그 성과를 더욱 풍부하고 심오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작업에 불을 지핀 연료, 즉 그의 이상주의와 헌신이다. 그가 소중히 여기고 욕망했던 것, 욕망 그 자체와 즐거움과 기쁨에 대한 긍정적 평가, 그리고 그것들이야말로 전체주의 국가와 영혼을 파괴하는 그 침식력에 반대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다.
--- pp.359~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