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너가 처음 로켓 시험을 한 것은 겨우 12세 때였다. 형 지기스문트를 설득하여 나무로 만든 손수레 뒤에 대형 불꽃놀이용 로켓 여섯 개를 매달고 베를린에서도 가장 부유한 동네인 ‘티에르가르텐 거리’ 한가운데서 불을 붙이고 올라탔다. 손수레는 유성같이 불을 뿜으며 앞으로 내달렸다. 희열의 순간이 지나고 경찰에게 붙잡힌 베르너는 다시는 이처럼 위험한 실험은 하지 말라는 훈계를 받고 풀려났다.
--- p.51
코롤료프가 6세가 되던 해에 당시 비행 쇼로 명성이 자자했던 세르게이 우토츠킨이 네진에서 비행기를 타고 떴다 내렸다 하는 비행 쇼를 펼쳤다. (……) 코롤료프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쇼를 구경하러 갔다. 외할아버지 어깨에 목말을 탄 코롤료프는 작달막한 체구의 비행사가 비행기에 올라타는 것부터 병사들이 복엽기의 프로펠러를 손으로 돌리는 것, 비행기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 20여 명의 병사가 한참이나 날개와 꼬리를 붙잡고 있는 것, 굉음과 누런 먼지를 날리면서 비행기가 앞으로 나갈 때 병사들도 같이 뛰는 모습, 비행기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 등 모든 장면을 눈여겨보았다.
--- p.56
폰 브라운이나 젊은 우주여행 열광자들의 관심사는 오직 우주여행의 꿈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한데 육군은 그만한 돈을 대줄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이런 유혹을 누가 거절할 수 있겠는가? 폰 브라운은 쿠메르스도르프에 있는 육군 서부 시험장에 합류해 도른베르거 밑에서 액체로켓 개발 기술책임자로 일하기로 했고, 동시에 베를린 대학교에서 공부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도른베르거는 폰 브라운이 본격적으로 로켓 개발에 참여하기 전에 공부를 마치도록 배려하여 육군 장학금을 주선해주었다.
--- p.74
1938년 6월 27일 아침, 두 명의 증인을 대동한 두 명의 비밀경찰이 코롤료프의 아파트에 들이닥쳤다. 속옷을 챙길 시간도, 자는 딸에게 인사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의 죄목은 액체로켓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국가에 필요한 고체로켓 연구를 고의로 지연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체포되어 부틸키 감옥에 갇혔다. 그곳에서 컨베어라는 심문 방식으로 그를 괴롭혔는데, 여러 명의 심문자가 몇 시간씩 교대로 밤낮없이 며칠이고 계속 심문했다.
--- pp.129~130
코롤료프는 세계 최초로 R-7이라는 ICBM을 발사하는 데 성공했고, R-7을 발사체로 이용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지구궤도에 진입시켜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그는 세계 최초로 유인위성 발사, 세계 최초의 우주유영, 세계 최초의 달 뒷면 사진 촬영 등 그 후로도 약 10년간 ‘세계 최초’ 행진을 계속했다. 그 성공의 비결은 코롤료프라는 개인의 탁월한 관리능력과 우주개발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있었다. 코롤료프가 아니었으면 그 같은 업적을 다른 어느 누구도 이뤄낼 수 없었을 것이다.
--- p.190
스푸트니크 1호 소식이 워싱턴에 알려지자 마치 폭탄이 터진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미 국방부 전문가들은 인공위성 자체가 아니라 수소폭탄을 보유하고 있는 소련이 다단계 ICBM을 개발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충격을 받았다. 전 세계 언론이 소련의 성과를 칭찬하고 소련의 과학기술과 군사적 우위성이 드날릴 때 이름조차 알려질 수 없는 수석설계사들은 깊은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러시아어로 번역된 전 세계 언론의 소련 과학자들에 대한 열광적인 찬사와 그들의 업적을 설명하는 서방 로켓 전문가와 인공위성 전문가의 코멘트와 사진을 보면서 코롤료프와 동료들은 생각했다. 이와 같은 업적을 이룩한 소련의 과학기술자들은 누구인가?
--- p.241
1959년 당시에는 1960년 말까지 우주인을 궤도에 진입시킨다는 것에 소련은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나 미국이 머큐리 계획을 발표하자 소련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제는 위성이나 우주개발이 단순히 군사적 응용 차원을 넘어 국가의 자존심으로 발전한 것이다. 우주 경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그만둘 수도 없는 형편이 되었다. 16 명의 우주 프로그램 지도자가 서명한 ‘우주비행사 발사 승인’을 요청하는 탄원서가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전달되었다. 이로써 유인위성을 1960년 12월 중으로 발사할 모든 준비가 끝난 셈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대형 참사로 인해 그들은 석 달 이상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 p.266
흐루쇼프 소련 수상은 궤도를 선회하는 가가린을 배경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아, 우리를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라고 소리쳤다. 폰 브라운은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가가린의 발사는 세계를 뒤흔든 사건이다”라고 일단 축하한 뒤, 백악관과 국회를 의식하여 “우리는 소련을 따라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뛸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미국 의회는 야단법석이었고, 케네디는 소련이 연속적으로 만드는 ‘세계 최초’ 시리즈에 아주 질린 상태였다.
--- p.283
아폴로 11호 승무원들은 달에서 지구로 무사히 귀환한 후 영웅이 되었고 함께 『첫 번째로 달에 가다First on the Moon』라는 책을 펴냈다. 그들은 가죽으로 제본한 책을 폰 브라운에게 선물했는데, “달 여행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예언했고, 광고했고, 지휘했고, 이끌어주고, 마지막으로 우리를 달까지 밀어준 베르너에게”라는 문구를 적고 셋이 모두 서명했다. 폰 브라운이 평생 해온 일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문구였다. 만약 폰 브라운과 그의 팀이 없었어도 미국이 달에 갈 수 있었을까? 그렇게 빨리는 아니었겠지만, 언젠가는 갔으리라는 것이 당시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공군 장군으로 1964년부터 1969년까지 NASA에 파견되어 아폴로 프로젝트 책임을 맡았던 새뮤얼 필립스는 폰 브라운의 독특한 경험과 기술 그리고 폰 브라운과 그의 팀이 지닌 천재성이 없었다면, 아마도 새턴-V의 개발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정작 폰 브라운의 대답은 딴 데 있었다. 자신과 동료가 없었어도 어차피 인류는 달에 가게끔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덧붙여 그는 우주 개척은 원맨쇼가 아니라고 말했다.
--- pp.321~322
달 탐험의 경험과 하드웨어를 살려 우주로 뻗어나가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담은 계획이었지만, 국민과 의회와 닉슨 정부는 원대한 계획에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미국 국민이 화성에 사람을 보내자는 대담한 계획에 등을 돌리게 된 단초는 ‘아폴로 계획’이 거둔 찬란한 성공이었다. 소련과의 경쟁에서 완승한 후 기왕에 추진하던 아폴로 계획조차 축소하려는 마당에 아폴로 계획보다 훨씬 많은 예산이 필요한 계획을 새로 시작할 리가 없었다.
--- p.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