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담장을 허물고 있는 단지 근처를 지나쳐 걸었다.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닌 소음이 이어져 기압이 높지 않음에도 귀가 먹먹했다. 자선공연을 하는 남자의 곁을 지날 때쯤 노인은 작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유쾌하고 즐거운 노래였는데 음조를 지키지 않고 불렀기에 만약 누군가 귀를 기울인다면 장난에 가까운 혼잣말처럼 들릴 것이었다. 노인은 자동차가 줄지어 세워져 있는 공용 주차장에 몸을 숨기고 포도 향이 나는 담배를 가볍게 깨물어 피웠다. 노인의 얼굴 위로 무언가 물러나듯 햇빛이 드리웠다. 기분이 좋았다. 몸이 비교적 따뜻했다. 이대로 햇볕에 반쯤 바랜 자신이 죽음을 몰아내지 못하고 기진맥진해서 주차장 바닥에 여러 차례 으깨져 누워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자 온 사방이 순식간에 눈부시게 환해져, 그와 동시에 교각 아래 공원에서 달리기를 하며 바람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또한 상상했다. 핫소스 병. 등대. 나무껍질. 상점들. 가지요리. 사이다 자판기.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사람들. 자두를 증류해 만든 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루이스 페데리코 를루아르의 강의를 듣기. 그곳에 두꺼운 이론서를 두고 뒤돌아 자리를 떠나기. 의자를 넘어뜨리면서 시끄럽게 문을 열기. 모든 것이 사실 같았다. 노인의 머리가 어지러워 계속 흔들거렸다.
이런 곳에 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빛 가운데 걷기」중에서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이곳은 태 선배가 운영하는 카페는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크고 넓은 곳에 통유리 바깥으로 선 베드가 여러 개 있고 커피족욕 시설까지 갖추고 있는 곳이라니. 카운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장으로 보이는 어떤 남자가 노랑머리 직원과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그는 태 선배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블루마운틴 커피 한 잔과 허니버터브래드를 앞에 놓고 있는 나는 평온한 듯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머릿속은 마구 헝클어진 상태였다. 나의 마음은 사람을 신뢰하고 싶다는 소망과 이용당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 어디쯤에 놓여 갈팡질팡했다. 선배를 믿지 않았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뭐라 말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허니버터브래드 위에 끼얹어진 캐러멜소스를 보면서 어떠한 음식 맛도 모두 가려버리는 소스처럼 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고상한 척을 하며 앉아 있었다.
---「고상 소스의 세계」중에서
두 달 전, 대표와 면담에서 나는 입사 면접 때 제출한 기획안이 친구의 아이디어를 허락 없이 사용한 것이라 고백했다. 대표가 칭찬한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했다. 대표는 그 기획안이 뭐였느냐 물었다. 준비한 문서 파일을 건네주자 찬찬히 읽어보더니 이제 기억이 돌아온다면서 잠시 웃다가 얼굴에서 미소를 금방 지워버렸다. “그런데 이건 당신을 채용할 때 결정적으로 고려한 사안은 아니었어요.” 대표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실력을 충분히 입증한 사람이고, 그것만 보자면 회사에 남지 못할 이유는 없지만, 이것은 원칙의 문제라고 했다. 그러니까 입사 시 허위의 문제가 있었다면 채용은 취소되어야 했다. 대표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러다가 생각을 정리한 듯 진실하지 못한 사람과 일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조용히 마무리하기로 해요.” 스스로 회사를 나가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그 말대로 했다.
---「양배의 이야기」중에서
백년열차는 여전히 느리게 달리고 있었다.
느려터진 흉몽에서 겨우 깨어난 소설가는 어이없음과 허기를 동시에 느꼈다. 백 년 전의 공상 소설가가 되는 꿈을 꾸다니. 차창을 바라보니 사납게 내리던 눈이 어느새 그쳤는지 해변으로 끝없이 달려드는 회색빛 파도만 가득하게 있었다. 객실을 둘러보니 테이블에는 빈 소주병이 백년열차의 흔들림을 따라 이리저리 구르는 게 보였고, 노트북 자판기엔 라면 국물이 조금 튀어 있는 것도 보였다. 테이블로 가 노트북을 살핀 소설가는 한숨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설을 꿈에서만 썼던 모양인지, 노트북 속 워드 프로그램은 깨끗한 백지만 내보이고 있었다. 소설가는 머리를 긁적이며 꿈속에서 엿봤던 문장들을 끼적이기 시작했다. 다섯 문장 정도 적었을 때, 소설가의 신발에 단단한 뭔가가 채였다. 바닥을 살핀 소설가는 상당히 어리둥절해졌는데, 그의 발에 걷어차인 것이 포켓 술병이었고, 포켓 술병에 酒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술병을 집어 드니 내부에서 술이 찰랑거리는 게 느껴졌다. 포켓 술병은 깔끔해 보였지만, 한편으로 상당히 오래된 술병처럼 보이기도 했다. 낡은 술병 때문에 기분이 오묘해진 소설가는 노트북을 덮고 객실 안에 널브러진 자신의 짐을 정리한 다음, 열차장을 찾아갔다. 열차장은 소설가의 요구를 듣고 난감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년열차」중에서
꿈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자고 있지 않았다. 벽지에 묻은 얼룩의 흐름을 따라 이런저런 기호를 상상하다가 옆에 놓아둔 책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내가 부탁했던 책들을 졸면서도 용케 꼭 쥐고 챙겼다. 『중세 서유럽에서 일어났던 마녀의 기원과 소멸』. 매우 평범한 제목이다. 내용도 틀림없이 평범한 개론서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요란한 띠지 광고로 미루어 한두 가지 새롭게 발견한 사료를 추가했을 가능성은 있다. 아까 삽화를 살펴보니 이전에는 못 보던 자료 그림이 꽤 들어가 있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면 아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여보, 오늘은 출근 안하는 날이야?’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려고 들면 잠이 깼다. 그래, 여긴 우리 집이 아니지. 그러다 다시 벽지와 책표지를 멍하니 들여다본다. 『남부 유럽의 우물과 성당과 마녀』. 이 책은 좀 새로워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주장은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 자료가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쩌면, 중세 어느 마을의 전체지도가 하나쯤 들어있을 지도 모르겠다. 여기는 우물, 여기는 성당, 여기는 마을회관…『마녀의 남편』. 이 책은….
누군가 쾅, 하고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란 나는 눈을 떴지만 몸을 제대로 일으킬 수가 없었다.
“뭐야, 여기서 내 허락도 없이 자는 거야?”
흙 묻은 등산화가 곁으로 다가왔다. 등산화 위로 가늘고 하얀 종아리가 보인다. 시커멓고 커다란 짐승 다리가 아니었다. 그 종아리 위로 뭔가 보일 듯하자, 냉큼 등산화가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그제야 붉은 치마가 제대로 보인다. 무릎 위로 야무지게 치켜 올라간 치마. 내가 저 모습을 어디서 봤더라…. 붉은 치마 위에 헐렁하게 걸친 연회색 스웨터.
---「푸른 미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