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는 계곡의 구불구불한 길을 위태롭게 내려갔다. 그때 갑자기 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지? 바람도 안 부는데…….”
그때 차 뒤쪽을 보고 있던 준표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빠! 우리 지나온 길에 산사태 났어요.”
“뭐?”
백미러로 보니 방금 지나온 길로 흙더미와 나무들이 물밀 듯이 밀고 내려와 도로가 끊겨 있었다.
“큰일 날 뻔했네! 빨리 여기를 벗어나야겠어!”
아빠는 식은땀을 흘리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미끄러지듯이 빗길을 내려가는데, 준표 눈에 또다시 거대한 산사태가 밀려 내려오는 게 보였다.
“아빠, 저기 또!”
시커먼 산사태가 녹산사를 덮치고 있었다.
---「장마 속 이사」중에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그 장면을 보고 너무 놀라 엄마는 눈물만 흘렸다.
아빠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허! 허! 헝!”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은 준표였다.
“신고할게요.”
119를 누르고 연결이 되자 준표가 다급하게 외쳤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119죠?”
“네, 무슨 일이십니까?”
“산사태가 나서 차가 쓸려 내려갔어요. 저희는 녹산으로 가는 중이었어요.”
“당황하지 마세요. 지피에스 보니까 239번 국도에 계신 걸로 나오는데 맞습니까?”
“그건 모르겠고요. 녹산사에서 녹산시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었어요. 녹산사도 흙더미가 덮쳤어요.”
“진정하시고요. 옆에 있는 전봇대나 가로등에 있는 번호를 불러 주세요. 지금 산사태 때문에 출동이 많은데, 어디 피해 있을 곳은 있습니까?”
---「응급실 세 가족」중에서
상가를 터덜터덜 빠져나오는데, 시장 골목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갑자기 허기가 졌다. 주머니에 만 원짜리 한 장이 있었다. 튀김과 떡볶이 먹을 만한 분식집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골목 초입에서 한 남자애가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여 뭔가 사정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보니 여자애 셋이 남자애를 둘러싸고 욕설을 쏟아 내며 뭔가를 돌려주지 않고 있었다.
“하지 마. 돌려줘.”
“그러니까 수학 시험 볼 때 답 보여 줬어야지.”
“미, 미안해. 내가 가르쳐 줄게.”
“누가 너한테 배우고 싶대? 답이나 보여 달라고.”
여자애가 들고 있는 것은 복사한 서류 뭉치 같았다.
“시험 문제 보여 주는 건 부정행위잖아. 그러니까 내가 가르쳐 줄게.”
“야, 재수 없는 수학을 내가 왜 배워? 네가 몸만 조금 옆으로 옮기면 내가 답을 볼 수 있었잖아.”
남자애는 여전히 쩔쩔매고 있었다. 여자애들은 남자애를 완전히 벌레 취급하는 거 같았다.
---「특이한 아이」중에서
그날 저녁, 아빠는 문제를 풀지 못했다.
“이거 방정식에 함수에 집합까지 다 합쳐진 거야. 어우 어렵네. 이걸 너네 반 애가 푼다고?”
“네, 수학 천재래요.”
“와! 우리 고향에 괴물이 있었구나.”
“아빠, 이것도 못 풀면서 어떻게 학원을 해요?”
“정답 보고, 푸는 방법 보고, 외워 가지고 가르쳐 주면 돼. 아빠가 알아야 할 것은 고등학교까지의 수학 문제일 뿐이야. 이건 고등 수학 문제인 것 같아.”
“그렇게까지 수준이 높은 문제예요?”
“응.”
순간 준표는 정식이가 약간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수학 문제를 매일 푸는 ‘오타쿠’ 같은 녀석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여자 친구 강세인」중에서
머리를 긁적거리던 정식이가 물었다.
“너는 언제부터 수학이 싫어졌어?”
“x, y 같은 골치 아픈 기호 나오고 막 그러잖아? 그때부터였어.”
“하하하! 방정식! 내 이름하고 똑같은 거.”
“맞아, 방정식! 방정식 정말 싫어했는데, 사람 방정식하고 친해지다니!”
“방정식 정말 쉬워. 이거 한번 풀어 볼래?”
정식이가 흰 종이에 문제를 썼다.
2+x =7
“여기서 x가 뭐지?”
“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것도 못 풀 것 같아? 5잖아.”
“아주 잘하네! 그렇게 기호 대신 숫자 넣는 걸 ‘대입’이라고 하는데, 5를 대입하면 이 등식이 성립되지. 등식이 이퀄(=)인 건 알지?”
“응, 똑같다는 거잖아.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수학 선생님이 맨날 ‘이꼬르’라고 했었어.”
정식이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종이에 쓰인 방정식을 가리켰다.
“이 이퀄을 중심으로 왼쪽을 ‘좌변’, 오른쪽을 ‘우변’이라고 해. 방정식은 등식이야. 다시 말하면 ‘등식’이 성립되어야 하는 거야. 네 말대로 등식은 똑같다는 거지. 2+5는 오른쪽에 있는 7이랑 똑같잖아? 등식이 성립된 거지. 이런 걸 방정식이라고 해. 그리고 x 대신 들어간 수를 ‘해’라고 하지.”
---「다시 만난 수학」중에서
“준표, 너는 꿈이 뭐야?”
“저요?”
“그래, 너.”
“그냥 돈 많았으면 좋겠어요.”
“또 돈이냐?”
“네. 아빠가 회사 그만두고 나서 치킨집까지 망했거든요. 그랬더니 사람 취급을 못 받더라고요.”
이사 오면서 산사태를 만나고 학원을 차리면서 아빠 엄마가 먹고살려고 아등바등하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그래, 사람이 먹고살려면 돈이 중요하지. 하지만 돈 자체가 목적이 되면 좀 곤란해. 너희가 정말 좋아하고 평생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면, 그깟 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준표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확 올라왔다.
“선생님, 그건 공자님 같은 말씀이에요!”
여기저기서 애들 원성이 터져 나왔다.
“오우, 라떼라떼.”
준표는 어떤 꿈을 가져야 돈을 벌어서 엄마 아빠를 편안하게 해 줄까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파 왔다. 꿈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선생님이 정식이를 가리켰다.
“수학 천재 정식이, 너는 꿈이 뭐니?”
“저요? 저는 밀레니엄 난제 일곱 개를 푸는 게 꿈이에요.”
“밀레니엄 난제?”
“뛰어난 수학자들도 풀지 못했던 난제들이에요.”
---「밀레니엄 난제」중에서
‘개원을 축하합니다!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준표네 가족에게 더 이상 행운은 없었다. 준표는 밖으로 나와 냇물 위의 다리로 가서 난간에 기대고 흐르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을 보니 조금은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터질 것 같던 분노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자기가 없어도 사람들은 흘러가는 물처럼 저마다 먹고살기 위해 바쁘게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뛰어내려 죽어 버릴까?’
하지만 뛰어내려서 죽을 만큼 높은 다리가 아니었다.
‘뛰어내려 봐야 개쪽만 팔리겠다.’
다리 위에 멍하니 서 있는데 뒤에서 정식이가 불렀다.
“준표야, 뭐 하냐? 뛰어내리려고?”
속을 들킨 것 같아 가슴이 뜨끔했다. 빙글빙글 웃으며 다가오던 정식이는 장난을 치려다 준표의 어두운 얼굴을 보자 흠칫 놀랐다.
“무슨 일 있냐?”
“우리 학원 문 닫았어.”
“뭐? 왜? 너넨 월세 안 내도 되잖아.”
“월세 안 내는 게 문제가 아니야. 돈을 못 벌면 망하는 거지. 학원에 있는 컴퓨터랑 프린터도 다 떼어 갔어. 인테리어 사장님이.”
“저런!”
다리 난간에 두 팔을 걸치고 같이 흐르는 물을 내려다
보던 정식이가 두툼한 손으로 준표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집 망해 봐서 아는데, 그 정도면 망한 거 아니야.”
---「라마누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