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완전한 신이 정신 사납게 우주를 만들고, 이 세계의 운행을 주관하며, 인간의 심판에까지 관여하는지는 알 수 없다. 신이 왜 이런 행위를 하는지에 대한 납득 가능한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믿어야 한다. 이 신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내는 것은 신성 모독이 되고, 신성 모독을 범한 이는 영원한 지옥 불에 의해 처단된다. 이렇게 신에 대한 믿음은 합리적 설명이 아니라 어쭙잖은 협박으로 유지되어 왔다.
--- pp.30~31
유신 종교는 신에게 선택을 받아 그 신의 영역 안에서 행복을 향유할 것을 가르친다. 이 때문에 유신 종교에서는 신에 대한 헌신과 순종이 강조된다. 이에 반해 진리 종교는 진리와 나의 관계를 중시한다. 진리를 통해 스스로 각성하고, 자신의 내면을 조절하여 스스로 행복을 성취하는 구조인 것이다. 진리와 나의 이런 연결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수행, 즉 명상이다.
--- pp.36~37
예전 교수들은 정년 이후 10년 정도 덕담으로 소일하면서 어른 대접 받다가 돌아가시는 게 수순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저 집에 있자니 너무나도 쌩쌩(?)하고, 그렇다고 해서 죽을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를테면 덕담 30년도 능히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과거에는 너무 일찍 죽는 것이 문제였지만, 이제는 너무 오래 사는 바람에 감당하기 힘들 만큼 노년이 길어진 것이 문제다. 교수와 달리 일반적인 직장인은 50세(한국인의 평균 퇴직 연령은 49세) 즈음에 정년을 맞는다. 이런 경우 이후 40년 동안, 더 끔찍하게는 이후 50년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심도 있게 고민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집과 가족이 멀쩡히 있어도 독거노인처럼 서글프게 살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필요한 것이 내적인 자기 조절과 행복 추구, 즉 명상이다.
--- pp.55~57
고려의 지눌은 『수심결(修心訣)』에서 모든 외적인 것은 진정한 내 것이 아니라고 했다. 진정한 내 것은 외적인 대상이 아닌 내적인 어떤 것이며, 진정한 행복은 외적인 만족이 아닌 내적인 각성이다. 외부에서 오는 행복은 결코 내면에서 솟아나는 행복에 비견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노년의 독거노인화를 피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내면을 컨트롤하는 명상을 익히는 것이다.
--- p.64
진정한 승자는 홀로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관통하면서도 행복한 사람이다. 피세지인(避世之人)의 행복은 부탄의 행복처럼 불면 날아가는 허망한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입세지인(入世之人) 속의 피세지인(避世之人)’이 느끼는 행복, 즉 세상의 한복판에서 세상을 넘어서 있는 행복이다.
--- p.80
진정한 행복은 현실을 관통하는 행복이다. 왁자지껄한 스타벅스에서도 공부에 몰두하다 보면 소음을 관통하는 고요를 경험하게 된다. 명상도 그래야 한다. 진정한 명상은 삶과 유리되어서는 안 된다. 삶과 유리된 명상은 그저 허울 좋은 사기일 뿐이다.
--- p.82
명상이란 삶에서 도피하여 달팽이 집 같은 나만의 동굴로 숨어드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힘든 삶을 관통하는 도약의 원동력이며, 일상의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황금 갑옷이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 명상은 황홀한 꿈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명상의 중요성이 강력하게 대두된다. 명상은 소수가 전유하는 뜬구름 잡는 망상이 아니라, 삶의 투쟁에서 승리하고 행복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다. 양궁 선수나 성악가가 명상과 호흡법을 배워, 내적으로는 평안을 느끼고 외적으로는 좋은 성과를 내는 것처럼 말이다.
--- p.120
명상을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스트레스 자체를 경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자신이 경험한 스트레스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 마치 비극을 연기하는 연기자가 외적으로는 슬퍼하고 고뇌하더라도, 내적으로는 평화로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연기자는 자신이 연기하는 배역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슬프지만 슬픔을 넘어서 있다. 명상하는 사람 역시 스트레스를 경험하지만 스트레스를 넘어서 있다. 바람이 그물을 걸림 없이 돌파하는 것처럼, 명상을 하는 사람은 스트레스를 걸림 없이 돌파할 수 있다. 스트레스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관통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
--- pp.157~158
명상하는 사람은 내면이라는 메타버스 속에서 모든 통제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 가장 강력한 ‘홀로’로서 존재하는 셈이다. 실제로 모든 수행자는 이런 ‘홀로’의 단계를 거치곤 한다. 수행자는 ‘홀로’를 통해서 각성하고, 더 이상 타자가 필요 없는 슈퍼맨과 같은 영웅으로의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 p.223
중국 선불교의 마조 도일(馬祖 道一, 709~788)은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깨달음인 일상성을 강조했다. 그가 말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즉 일상의 마음이 곧 진리라는 천명은 현실을 관통하는 행복이라는 코드를 정확하게 조준한다. 마조는 진리란 일상을 벗어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존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마치 우주가 지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까지 포함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주 비행사나 외계인을 우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평범한 우리들 역시 단 한 번도 우주를 떠나지 않았던 우주인에 다름 아니다.
--- p.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