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전체성의 회복에 있다.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에서 배제되었던 무한성을 되찾고 비대해진 논리적 자아를 제한하려고 한다. 이것은 ‘생각’하는 자아에 선행하는 자아 ‘존재’의 강조로 나타난다. 생각하는 자아가 활동할 수 있기 위해 자아의 존재가 먼저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정립과 존재는 전적으로 동일하다.”(Fichte 1971, 98) 존재가 생각에 선행한다. cogito ergo sum이 아니라 sum ergo sum이 되어야 한다.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은 sum ergo sum(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cogitans sum, ergo sum(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cogitans(생각하는)는 전적으로 부차적이다.”(Fichte 1971, 98)
---「제1장 ‘낭만주의 철학과 개성적 삶’」중에서
지난해(2021) 독일은 흥미로운 낭만주의 논쟁을 벌인 바 있다. 논쟁의 발단은 문명 대국인 독일이 왜 유럽에서 백신 접종률이 최하위권인가, 하는 물음에서 나왔다. 백신이 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백신은 남아도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인구가 대단히 많은 나라도 아니다. 독일 사람들이 백신 접종을 적극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현상에 대해 논의하던 중 그 원인은 바로 낭만주의에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즉, 독일의 백신 회의주의는 ‘독일 낭만주의의 후속결과’라는 것이다. 낭만주의의 문명비판과 자연주의가 백신 거부로 이어졌다는 논리다. 자연을 훼손하여 코로나를 야기한 것이 문명인데 백신은 그보다 더한 문명의 산물이라는 입장이다. (중략) 백신 거부와 낭만주의를 바로 연결 짓는 것은 위험한 일반화이고 비판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낭만주의가 독일인들에게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에피소드다. 요컨대, 현대의 문명비판과 자연주의적 사유의 근저에 낭만주의가 한몫하고 있는 셈이다
---「제2장 ‘독일 낭만주의 문학’」중에서
낭만주의 작가와 관련된 멜랑콜리 개념은 종종 심리적으로 낙담 상태에 빠지거나 좌절된 감정이라는 의미로 협소하게 받아들여지는 경향도 있지만, 낭만주의 작가의 내면에 담긴 멜랑콜리적 감정은 자신이 현재의 시간 속에서 민감하게 느끼는 것과 모든 것을 초월하고픈 간절한 욕망 사이의 긴장 관계로 인해 야기된다. 이렇듯 일종의 변증법적 관계를 오가며, 이 두 영역에서 자신이 마음 둘 곳을 모색하는 가운데 내면은 더욱 균열을 경험하게 된다. 이 변증법적 관계는 작가가 이 두 영역 사이의 한계적 시공간에서 자신을 동화 혹은 몰입시킬 때, 균열된 감정이 잠시 안정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제3장 ‘워즈워스의 사색과 관조로서의 멜랑콜리적 감수성’」중에서
선비는 학문과 예술을 두루 섭렵하고 통합적 이해를 추구한 교양인이었다. 이들에게 학문과 예술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세계였다. 이들은 음악이 음에 대한 탐구를 통해 삶의 궁극적 의미를 고민하고 존재를 한 차원 높이 이끄는 학문이라 생각했다.
---「제4장 ‘선비의 낭만, 선비의 음악’」중에서
선비들의 풍류는 자연 친화적이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 자유는 격식과 틀을 벗어나고 이해득실을 잊은 담백한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풍류는 노·장과 도가사상, 선불교의 무심의 미학과 관련이 깊다. 무심의 미는 청정의 경지이며 너머의 세계, 근원과 본질에 대한 지향성이다. 따라서 무는 곧 도라 할 수 있다.
---「제4장 ‘선비의 낭만, 선비의 음악’」중에서
‘낭만’이란 단어는 일본의 근대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가 ‘로만(roman)’이란 영어를 음으로 표기하여 ‘浪漫’으로 쓰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어로 읽으면 영어 발음과 비슷한 ‘로만’이다. 그런데 굳이 이 한자로 음을 표기한 것은 그 소리뿐만이 아니라 글자가 지닌 의미도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浪’은 파도이고, ‘漫’은 ‘흩어지다. 질펀하다. 방종하다’의 의미가 있다. 특히 ‘漫’은 우리나라 윤선도의 「만흥(漫興)」 이 ‘저절로 일어나는 흥’이라는 의미가 있듯이 ‘저절로’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낭만(浪漫)’은 ‘이성’이나 ‘합리’와는 달리 인간의 감정이 파도처럼 저절로 요동치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제5장 ‘요사부송 하이쿠에 나타난 낭만성’」중에서
팬데믹 시대에 낭만주의 시를 읽으면서 신화적 해법을 찾는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성찰과 반성을 전제로 생태적 접근을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인간이 자연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역설적으로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졌다. 자연이 미분화와 참여하기의 세계라면 문화의 세계에서는 분화와 거리두기를 촉진한다. 결국 자연과 문화가 분리되고 문화에 의해 자연이 대상화되면서 풍요로움과 편리함이 오히려 결핍과 동경을 낳고 기술의 발달이 역병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제6장 ‘결핍과 동경의 역설과 역병’」중에서
여성 집회인 사경회와 성경 공부반은 문맹을 벗어나는 데 그치지 않고 기독교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기를 수 있는 바람직한 인성 및 감성교육까지 제공해 주었다. 그러므로 집안에만 갇혀 있던 여성들이 공공의 장소에서 감성적으로 위로하며 비슷한 상황의 어려움을 공유함으로써 서로 기댈 수 있는 안식처가 되었고, 자아 표현과 공동체성을 경험할 수 있는 장이 된 셈이다. (중략)
남아교육만이 가능했던 시대적인 제약에 도전하여 그들의 딸들이 자신과는 달리지식인으로 살아가기를 갈망하여 이화학당이나 정신여학교 등 서구식 근대여학교 교육을 통해 정규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관에 맡기는 결과를 낳았다. 즉 부녀자들이 자아인식을 통해 개인을 자각하고 자신의 삶을 찾고자 노력하며 여성이 더 이상 천시의 대상이 아니라 고귀한 개별 인격체임을 깨달아 자신들의 딸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를 열망하였다. 이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신여성과 여성지식인의 등장의 발판이 된다. 그러므로 근대여학교와 여성병원의 활성화는 언더우드 호튼을 포함한 미국여성선교사들이 개화기 조선의 어머니들에게 뿌린 낭만의 씨앗들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어 가는 과정의 발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제7장 ‘『상투의 나라』; 미국여성이 개화기 조선에 뿌린 낭만의 씨앗’」중에서
고야, 터너, 들라크루아, 프리드리히는 모두 개성 충만한 낭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각자 자기 시대와는 잘 맞지 않았으며, 명예를 완전히 포기했던 사람들도 아니었으나 각자 자신의 예술의 길을 치열하게 추구했고, 생전보다 사후에 더 가치를 인정받았다. 네 사람은 『자유론』 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의 말을 빌리자면, 빛나는 ‘개별성’을 소유한 천재들로서 한 시대를 이끌고, 사회를 ‘발전시킨’ 주인공들이다.
---「‘19세기 낭만주의 미술과 ‘낭만성’’」중에서
낭만주의를 관통하는 정치적인 사건으로 말하자면 바로 프랑스 혁명이 있습니다. 1789년의 일인데 모토가 ‘Liberte·Egalite·Fraternite, 자유·평등·박애’였습니다. 이건 달성할 수 없는 이상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포기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는 진리가 어떠니 자유가 어떠니 평등이 어떠니 하지만 이는 도착 불가능, 성취 불가능한 것에 대한 동경입니다. 이것이 낭만주의이고 우리는 이 낭만주의 속에 살아갑니다.
---「총평 ‘거룩한 슬픔; 이룰 수 없는, 그러기에 더욱 동경하는 데서 오는 낭만성’」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