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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 5월, 한숨 바람이어라

37년 5월, 한숨 바람이어라

: 법원이사관의 법원생활 객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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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2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216쪽 | 374g | 150*210*14mm
ISBN13 9791158544034
ISBN10 1158544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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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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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8. 1. 대구지방법원에서 첫 근무를 시작한 이래, 이번 연말 수원고등법원 정년퇴직에 이르기까지 37년 5개월을 근무하게 된다. 어찌 보면 근무라고 하기보다 그냥 하나의 계속된 삶이었다. 직장을 벗어난 삶을 생각해 보지 못했기에 다가오는 정년은 불안하다. 새로운 삶에 대한 걱정, 기대, 두려움이 사람의 마음을 야릇하고 들뜨게 만든다. 어쨌든 삶은 계속돼야 하니까.
---「머리말」중에서

부산에 오면서 지난 세월 부족했던 것이 다 채워졌다. 우선 법원 마당에도 한창 겨울인 1월부터 동백꽃이 피어 있었고, 산책길에도 있으며, 관사 뒤편에 있는 화지산에도 간간이 동백이 피어 있었다. 해운대 동백섬은 동백으로 덮여있고 거제 지심도는 섬 전체가 동백이었다. 피는 시기도 12월부터 4월까지 다양하였다. 피고 지고하면서.

그러던 4월 어느 날, 경남 남해군 독일마을 도로 아래쪽에 위치한 물건마을 어느 빈집에서 동백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였다. 그 집 붉은 함석지붕은 일부가 벗겨지고 마루는 퇴색하였으며, 주위는 돌담과 무성한 숲으로 둘러져 있었다. 그 돌담 가장자리에 선 동백나무는 지붕보다 높았고 꽃이 만개하여 바닥에도 떨어져 수북이 쌓여 있었다. 멀리서 보니 그 떨어진 꽃송이들이 가을날 말리려고 마당에 널어놓은 붉은 고추 같았다. 순간 봄과 가을을 한꺼번에 느꼈고, 그 고요함과 평안함에 전율했다. 최고의 동백을 본 것이다.
---「첫째 마당_향기」중에서

올해 98세의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는 여전히 골초다. 금연이 엄격한 독일에서 그는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우는 엄청난 특혜를 누린다. ‘지혜로운 슈미트 할아버지의 담배 연기는 공해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우리로서는 매우 부러운 현상이다. 연전年前에 어떤 의학전문기자가 강연을 왔을 때 들은 이야기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보다는 담배를 피우는 것이 낫다’라고 하였다. 담배를 피워서 행복하고 스트레스도 잘 해소된다면 어떨까.

하지만 담배 피우는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도 더욱 살피게 된다. 그래서 인사이동 시 흡연자는 같은 사무실에 담배 피우는 사람이 오는 걸 아주 좋아하고 환영하고 있다. 한때 강 국장은 그 사무실 사법 보좌관 6명 중 혼자서 담배를 피우다가 흡연자 두 분이 한꺼번에 오는 바람에 3명이 되어, 이번 인사의 최대 수혜자는 자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난 3월 국장 연수 갔을 때의 얘기다. 마두역 뒷골목을 몇 차례 옮겨 다니며 밤늦게까지 강 국장과 소주를 마시다가 그가 두리번거리면서 또 담배를 꺼내 물기에,
“강 국장님, 왜 담배를 피우세요?”
“…”
대답이 없기에 다시 물었더니, 귀찮다는 듯이
“국가 재정을 위해서요….”
---「첫째 마당_담배, 그 쓸쓸함에 대하여」중에서

제주 사람들은 진정 강 과장님을 잊지 못해 하는 것 같았다. 부모가 오셔도 어찌 이렇게까지 반가워할 수 있겠는가. 밤마다 찾아오고 낮에도 동행하고. 지난해 강 과장님이 중앙법원에 부임해 와서 점심 식사하러 밖에 나가면, 직원들이 멀리서 보고서도 달려와 ‘강 과장님~’ 하면서 곧 자지러지면서 반가워하는 장면을 몇 번이고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는 그 상황에 적응이 잘 되지 않았었다.
---「첫째 마당_제주 오름 여행기」중에서

10여 년 전 대구법원 소속 청송등기소 근무 시절, 낙동정맥을 오르내리다가 주왕산국립공원 뒤편인 영덕군 달산면 어느 오지 마을에서 ‘양반탈’을 덮어쓴 듯이 똑같은 할아버지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놀랍고도 기뻐 쳐다보고 또 쳐다본 적이 있다. 그때는 아예 그 할아버지 댁까지 따라 들어갔다. 들어갔더니 며느리 되는 분이 손님 대접한다고 옥수수를 내어 왔다. 그 할아버지는 이마에 보기 좋은 주름이 여러 줄 겹쳐지고 붉은 혈색에 웃고 계셨다. 아니 웃음을 웃기보다 그냥 얼굴 자체가 웃는 표정이었다. 마치 전화戰禍도 겪지 않고 늙은 사람처럼.
---「둘째 마당_국어문화학교 수료기」중에서

세종 10년, 영남의 강주에서 김화라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은 큰 충격에 빠지고, 스스로의 부덕함을 여러 번이나 자책하고 어전 회의를 열었다. 거듭된 논의 끝에 백성들의 교육에서 그 해법을 찾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한다. 김화가 삼강오륜을 알았더라면 아버지를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이 인륜이 무엇이고 도덕이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집현전 부제학 설순에게 명하여 고금의 충신, 효자, 열녀 중에서 뛰어나게 본받을 만한 인물의 이야기를 뽑아서 글로 써서 그들을 칭송하고, 문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서는 글 외에 그들의 행적을 잘 알아볼 수 있도록 그림을 그려서 책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이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비록 그림으로 보아서 그들의 행적을 과연 얼마만큼 깊이 이해할 수 있을지가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이러한 왕의 고민은 살부殺父 사건이 발생한 지 18년 후에야 결실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곧 한글의 발명이다.
---「둘째 마당_국어문화학교 수료기」중에서

사람은 일처리를 효율적으로 잘 해냄으로써 성취감을 맛볼 수 있으며, 구성원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을 때 보람이 있게 된다. 그렇지 못하고 불량 민원인을 만난다든지, 민원 처리 과정에서 진정을 받거나 불친절 카드를 받는 직원들은 무력감에 빠져들게 되는데, 이것이 가장 큰 걱정이다. 이 무력감이 직원들을 소극적으로 일처리를 하게 만들고 심지어 우울증에 걸리게 하며 사무실을 침울한 분위기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진정을 받아도 가능한 직원들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고 격려하려고 애써 본다. 또 여유를 가지고 민원인을 맞을 수 있도록 민원 부서 업무를 조금이라도 줄여 주기 위해 노력해 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어 고민은 깊어지기만 한다.
---「넷째 마당_불량 민원인」중에서

속기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글자 하나하나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단어나 어절을 중심으로 기록하는 기술입니다.
대개 10음절 이상을 듣고 난 이후에
그 뒤를 따라가면서 속기를 하게 되며,
가장 표기하기 쉬운 방법으로 기록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소란 등 외부 충격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그 10~20음절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사람이 그런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오전부터 저녁까지 때로는 한밤중까지, 또 몇 날 며칠
사무실과 법정을 오가면서 계속 속기업무에 매달릴 때
그 집중력을 한결같이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그런 어느 날,
재판이 밤 11시가 넘어갈 무렵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졌답니다.
---「넷째 마당_나는 누구일까요」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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