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는 예부터 ‘사뇌가詞腦歌’로 불렸다. ‘사뇌’는 ‘가사가 정밀하다[精於詞]’는 뜻[意]이다. 이 때문에 ‘사뇌가’는 ‘노래 중의 노래’이자, ‘가사 중의 가사’로 불렸다. 동시에 ‘시가 중의 시가’이자, ‘송가 중의 송가’로 불렸다. 나아가 향가는 ‘가요 중의 가요’로 일컬어졌다. 향가는 최고의 노래이자 가사이며, 최상의 시가이자 송가이다. 향가는 고대 동아시아의 시가 중 최정상의 가요였다. ……우리 〈현대향가〉 동인들은 ‘사뇌가’의 이러한 의미를 되새기며 제5집 『가요 중의 가요』를 펴낸다. 우리 고대 가요의 현대화이자 현대 가요의 고전화를 기대해 본다.
---「고영섭 시인의 서문」중에서
모두 열한 분의 시인이 122편의 ‘현대향가’로 참여하였다. 열두 편씩 시를 제출했는데,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열두 달 간 여일한 정신으로 정진한 증거가 아닐까. 시인은 오직 씀으로써, 독자에게 시를 보내어 공감대를 넓힘으로써 비로소 시인이 된다. 더구나 향가 정신을 계승하는 작업의 근간이 불도에 있기에 〈현대향가〉는 어느 시대건 퇴색하지 않는 정신세계를 언어로 기호화한다. …일문一門을 향해 가는 시인들이라 할지라도 일색으로 묶을 수 없는 특성이 있다. 〈현대향가〉의 무수한 지류는 결국에 불도라는 대양을 향하여 흘러가는 도도한 움직임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현대향가〉 시인들의 개성은 의미가 있다.
---「김효숙 문학평론가의 해설_이 시대의 언어로 쓰는 현대향가」중에서
갈고리 모양의 도깨비바늘로 말라 가다가
님을 보았어요, 사랑을 만났지요
다짜고짜 님의 가슴팍으로 뛰어들었는데
탁탁 털어내더군요
다시 악착같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지요
애면글면 붙어 가는데
집게손으로 뽑아내서 내동당머리치더군요
그만 혼절해 버린 내 사랑 위에
살포시, 박주가리가 씨앗날개로 덮어 주네요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주경림_도깨비바늘 식 사랑」중에서
거의 놀림을 받아 왔었다, 드디어
나의 결벽증을 모두 따라하니
웃어야 하나?
물을 두세 배 더 쓰게 되었다고들 말한다
게다가 손 소독제와 물티슈로
휴대폰, 손잡이, 눈에 띄는 물건들을 의심하고 의심한다
입은 옷들, 신발들도 햇살에 널어 둔다
한번 결벽증에 중독되면 지문指紋이 남아나겠나
왜, 앙코르와트 근처에서 몇 달씩 세 들어 살며
자전거 타고 유유悠悠하던 이방인들이 생각날까?
---「정복선_포스트 결벽증」중에서
정갈하게 비질한 마당 한구석
빗방울 굴러 내리는 집 한 채 지고
사방 둘러봐도 벽뿐인 집 한 채 지고
느릿느릿 끈적끈적
온 생을 다하여 줄 하나 긋고 있다
줄에서 줄로 이어진 어름사니 한 세상
두 개의 더듬이 길게 펴서 아찔한 중심을 잡고
바람이 흔들어도 천둥소리 금이 가도 돌아보지 않는다
아으, 천삼백 년이 고요한 아침 한나절
달팽이아라한 한 분
---「이혜선_묘적사 심우도妙寂寺 尋牛圖」중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리 누웠을까
멀리서 자기를 찾아와
노래 불러 줄 이를 기다리다
저렇게 평평한 마음이 되었을까
기다림이 다 사라지고
모두가 조급하게 내닫는 세상
어디 진정 기다리는 사람이나 있을까
어느 뉘, 한 가닥 거스름 없이
수평으로 길게 뻗은 저 마음 읽을 수 있을까
---「이창호_바다수평」중에서
그날 분황사 관음님 앞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무릎 꿇어 조아리던 때
끊어질 듯 이어질 듯 간절한 노래 한 곡 부르고
아름다운 옷자락으로 너의 멀은 눈 닦아 주시자
천지사방이 환하게 다 보인다고 소리치던 어린 너
관음님, 기억하는 거니?
너랑 나랑 늘 애처롭게 지켜보시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시는구나!
---「이영신_희명希明이 아들에게」중에서
어떻게 조사했는지는 모르겠어
줄을 지어 부지런히 기어가는 백 마리 개미들 중
일하는 놈은 스무 마리뿐
나머지 여든 마리는 건성 바쁜 척만 한다 하네
나 역시 이것저것 하는 척은 하고 있네만
조사하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기막힌 것은 부지런한 개미 스무 마리를 모아 놓으니
그중의 네 마리만 열심히 일하고
글쎄, 나머지는 일하는 척만 한다는 게야
근면한 개미가 그러하니 영리한 동물이야 오죽하겠나
---「윤정구_개미의 근면성에 관한 보고서」중에서
명을 이어 주세요
명 짧은 이를 위해 일곱 별님께 두 손 모으다
하늘의 둥근 공 모양을 향해 청하고 있어요
선악의 저편에서, 큰곰자리의 꼬리 즈음 머물다가
별님의 인도받아 차례대로 순번을 옮겨 가며
있던 데에서 왔던 데로 칠성 매듭 타고 돌아가다
빛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그렇게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시공 너머 돌아가셨다
그때 갑자기, 허공 속 망자여, 하나가 일곱이 되었다
그리고 흰빛이 내 곁을 지나갔다.
---「유소정_돌아가다」중에서
마음 한편에 띠집을 짓고
풍경이 되는 것도 길이다
닻을 내리고 풍경을 쓰다듬는
사금파리 같은 사람의 흔적이 눈부시다
굽이굽이 금빛 모래가 쌓이는데
시간은 흐르거나 머물지 않듯
전생의 물이 후생의 물
물은 어딘가로 가는 것이 아니다
아으, 해빙기 지난 해류의 느릿한 회통
흐름의 본질을 보여 줄 뿐
---「석연경_강」중에서
본래 나는 까망이었나 봐,
밀어낼수록 찰싹 달라붙는 너처럼
지우려 하면 더 선명해지는 내 전생, 까망,
말하지 않아도 돼, 네가 나를 떠나
어느 골짜기 헤매다 왔는지 말 안 해도 돼
어느 때는 나도 수많은 슬픔들과 어울려 다니며
먹구름으로 떠돈 적 있었으므로
네 까만 발바닥 밟고 선 내가, 네가 아니라고 우길 수가 없다.
---「김현지_그림자」중에서
사물들을 시원의 꿈에서 깨우는 사람의 목소리
이글거리는 거미 눈이 노려보는 거미줄의 축제
어둠을 더듬는 손가락에 잡히는 날개의 퍼덕임
듣는 이 없는 벌판에서 소년이 외치는 사람의 이름
배 떠난 항구에서 아이들이 부르는 합창
민족어의 상처들을 내 말 속에 새겨 넣는 일
한밤중 십 리 길 이웃 마을에 호롱불을 놓고 오는 일
밤새 정성들인 물 사발에 담긴 오색 심해어
한 사람의 목청에 떨리는 우주의 진동
집단무의식의 강물에 떠내려 오는 이름 모를 형상
침묵의 바위틈에서 울려나오는 순금의 빗살무늬.
---「고창수_시론」중에서
할 공부 다 한 이들 너무 많아서
될 부처 다 된 이들 너무 많아서
덜 부처 덜 큰 나는 설자리 없네
했다 됐다 넘어선 더 큰 나는 어디?
---「고영섭_할 공부 다 하고 될 부처 다 된-화두 6」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