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일기문:
『묵재일기』에는 을사사화의 단초가 된 이덕응(李德應)의 공초(供招, 조선시대에 죄인이 범죄 사실을 진술하던 일) 내용과 이문건의 큰조카 이휘(李徽)가 역모죄로 극형에 처해지고, 이문건 역시 연좌되어 유배되는 등 한 집안에서 일어난 불행했던 일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545년 9월 6일 맑음 윤임의 사위 이덕응의 공초에 따르면 “나숙(羅淑)이 말하기를, 윤원로는 간사하니 제거하는 게 옳다”고 하였고, 곽순은 “어진 사람을 골라 왕으로 세워야 하니, 어찌 미리 왕을 정해둘 수 있겠는가 등등의 말을 하였습니다. 이는 이휘가 제게 말하였기에 제가 들었던 것입니다”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이휘가 저녁에 체포되었는데, 문초하는 관리가 이와 같은 말들에 대해 묻자 이휘가 나식(羅湜)의 말이라고 대답하고, 나숙의 말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두 차례의 형벌이 가해졌고, 이에 바른대로 진술했다. …… 이는 참으로 (이휘가) 말이 많은 것에 따른 화(禍)이다. 나는 마침내 사직서를 올리기로 결심했다.
--- p.37
『미암일기』에서는 부부 사이에 발생하는 문제 등 16세기 사대부 부부의 일상도 엿볼 수 있다. 특히 유희춘과 부인 송덕봉은 당시로는 보기 드문 부부애를 보여 대단히 주목받고 있다. 예를 들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유희춘이 “부인이 문밖에 나가는데 코가 먼저 나가더라”는 한시를 지어 부인의 큰 코를 빗대어 놀리자, 부인은 “남편이 길을 가는데 갓끈이 땅을 쓸더라”며 키가 작은 유희춘을 놀리는 한시로 답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궁중에서 내려준 배를 부인과 함께 먹었다. 맛이 상쾌하니 최고 품질인 것 같고, 술도 너무 맛이 좋아 서로 경하하기를 그치지 않았다”라며 부부가 배 한 쪽도 나누어 먹으면서 술잔을 기울이는 등 함께 여가 시간을 즐기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밤 꿈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의 앞일을 걱정해 주기도 했다.
--- p.83
이지함에 대한 이이의 평가도 대단히 흥미롭다. 한번은 김계휘(金繼輝)가 “이지함이 어떤 사람이냐?” 고 묻자, 이이는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지함이 사망했을 때 이이는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어릴 적부터 욕심이 적었다. 추위와 더위 그리고 주림과 갈증을 잘 참는 특이한 기질을 타고났으며, 재물을 가벼이 여겨 남의 급한 사정을 도왔다.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고, 구속 없는 자유를 좋아하여 성리학에 종사할 것을 권하자 거절했다. 형 이지번을 스승으로 섬겼고, 아산 현감에 부임하여 고을의 민폐였던 물고기 기르는 연못을 없애버려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 p.141
2부 이야기책:
『태평한화골계전』에는 주로 한양을 배경으로 성균관과 궁궐 주변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실록에 기록된 내용도 적지 않아 실제로 저자인 서거정의 활동 반경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이는 그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위주로 기록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양반과 기생 사이에 벌어진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그 예이다. 김씨 성을 가진 나이 많은 관리가 평안도 함종(咸從)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했다. 관리는 그곳에서 만난 평양 기생 두추(杜秋)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관리는 자신이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숨기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령의 병세가 위독해졌다. 두추는 “기도를 드리려면 연세를 알아야 하는데 영감님께서 태어나신 날짜가 언제인지요?”라고 물었다. 관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삼십에다……”라고 말하고, 다시 이어서 “삼십에…… 다섯이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두추가 “그럼 어르신의 연세는 육십오 세인 게죠? ”라고 묻자, 관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이후 세상 사람들은 수령을 ‘쌍삼십 선생’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65세의 나이를 알아맞힌 기생의 재치도 흥미롭지만,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말하는 것을 망설였던 늙은 관리가 삼십(三十)을 두 번 말했다고 해서 ‘ 삼십(雙三十)’ 에 오직 다섯을 뜻하는 ‘단오(單五)’를 합해 ‘ 쌍삼십단오(雙三十單五)’라는 말도 생겨났다.
--- p.226
『어우야담』에 등장하는 귀신들은 대부분 ‘무언가에 대한 결핍’이 원인이었고, 사람들에게 나타나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기를 요구한다. 이러한 귀신의 행태는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유몽인이 생존했던 16~17세기는 임진왜란과 전염병 그리고 흉년 등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굶어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즐비할 정도로 생활이 비참했다. 다음의 이야기도 그 예이다. 한양 남부 소공주동(小公主洞)에 신막정(申莫定)의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은 항상 주인이 살지 않고 남에게 빌려주었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어보니 처음에 주인이 그 집을 사서 살았는데, 그 집에 귀신이 있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 귀신의 언어는 보통 사람과 같았으나, 형체만은 드러내지 않았다. 귀신은 집주인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노예같이 섬겼는데, 주인이 요청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들어주었다. 반면 귀신은 주인에게 항상 먹을 것을 요구했는데, 들어주지 않으면 그때마다 화를 내고 괴상한 짓을 하였다. 또 밤에 주인 부부가 침상에 누우면 귀신은 침상 아래 엎드려 웃었다. 그 때문에 괴로워서 다른 곳으로 피하면 귀신도 항상 따라다녔다.
어느 날 주인이 귀신에게 “네가 우리 집에 산 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모습을 못 보았구나. 네 모습을 벽에 그려 보아라”라고 말하자 잠시 후 귀신이 벽에 그림을 그렸는데, 머리가 두 개에 눈이 네 개이며, 뿔이 높이 솟아 있고 입술은 처졌으며, 구부러진 코에 눈동자는 붉었다. 주인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 빨리 지우라고 하였다. 주인이 귀신 모르게 방사(方士)에게 귀신을 퇴치하는 방법을 물었더니, “귀신이 배고프다며 밥을 달라고 할 때 들쥐를 잡아서 구워주면 반드시 귀신이 죽을 것입니다”라고 일러주었다. 주인이 그대로 하자 귀신은 단숨에 음식을 다 먹고 얼마 안 되어 통곡하면서 “주인님께서 나를 속이셨습니다. 이것은 들쥐고기입니다. 나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주인은 노량진 강가에 살면서 남에게 집을 빌려주며 세(貰)만 받았다.
--- p.290~291
3부 백과사전:
『지봉유설』에서는 인도의 캘리컷을 가리키는 고리대국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성품이 온유하여 형벌을 무겁게 하지 않고, 신의(信義)를 숭상하며, 길에서 만나면 서로 양보하고,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으며, 음악을 즐기고, 야자수를 여러 가지 생필품으로 활용하는 등 중국 상고시대부터 내려오는 풍습이 있다. 국민은 불교와 회교를 숭상하며, 코끼리와 소를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방글라데시를 뜻하는 방갈자(榜葛刺)를 “의약·점복·음양술 등 갖가지 기예(技藝)가 중국과 유사하다”고 소개하고 살마아한(撒馬兒罕), 즉 현재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인 사마르칸트도 소개했다.
--- p.399
『유원총보』에 이어 18세기에 이익에 의해 『성호사설』이 편찬되었고, 19세기에는 조재삼의 『송남잡지』가 간행되면서 백과사전의 계보가 형성된다. 이 책들은 중화주의를 완전하게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실정을 고려한 실용적인 지식과 함께 당시 사회상에도 주목하여 때로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비판 의식도 보여준다. 특히 『성호사설』의 저자 이익이 활동한 18세기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박물학을 지향하는 인식이 강화되었다. 즉 명물고증학적(名物考證學的) 방법이 전면에 드러나는 등 17세기부터 제기된 실학을 추구하는 학풍이 보완·발전하면서 실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성립되었다. 이익은 이러한 시기에 실학의 중심인물로 자리 잡았고, 자신의 실학적 성향을 『성호사설』에 잘 구현했다. 이는 새롭게 전개되는 학술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동시에 유서 편찬을 지속하는 풍토를 조성했다.
--- p.439~440
『송남잡지』 에서는 서구의 선진 문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영길리국(영국)·불랑기국(프랑스) 등 서양의 국가들을 소개하면서 서양 무기의 위력에 주목했고,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를 보고 “천하의 오대주에 사람들이 꽉 차 있으니, 그 땅이 진실로 있다는 것은 속일 수 없다”며 세계 지리에 대한 확장된 인식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땅을 몇 걸음 재서 벼락이 치면 미리 구덩이를 파고 우레가 굴러 구덩이에 들어가서 그치면 바로 파묻는다”라며 서양 과학에 속신을 결합했는가 하면, 아편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옛날에는 아편 담배가 없었는데, 서양 사람들이 앵속각(鶯粟角)에 사람의 정액을 섞어 만든다. 담배처럼 들이마시는데, 전생의 일이 모두 기억나고 두 배로 총명해지며 기력이 용솟음친다고 한다. 그러나 삼 년 동안 들이마시지 않으면 죽는다. 여기서 앵속각은 이질·기침·설사 등에 신기할 정도로 효능이 있다는 양귀비 껍질을 말한다.
--- p.474~4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