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의 “신성한 잉여”가 결국 “창조적 비평”이라는 비평 담론의 그물코에서 비롯하는 작은 무늬이듯, 그것을 제목으로 삼은 이 책의 욕망 역시 영화와 시와 비평의 크로스오버, 그 횡단과 융합의 실험적 시도가 불러일으킬 수 있을 감응 효과의 최대치를 겨냥한다. 물론 이 욕망은 기어코 좌절될 수밖에 없을 운명선을 타고 갈 것이 틀림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창조성이란 또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진중한 모험의 자리에서 생성될 수밖에 없다는 만용의 말로 이 책을 시작해보자.
---「책머리에」중에서
우리의 관심과 집중력은 임화의 ‘신성한 잉여’와 김수영의 ‘미학적 사상’, 그리고 21세기 한국문학을 새로운 국면으로 열어나가려 했던 ‘미래파’와 ‘정치시’를 좀 더 웅숭깊은 심미성의 차원이나 훨씬 드넓은 역사철학적 안목에서 해명할 수 있는 원리론을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기성 예술 장르로서 이미 안정성의 장을 공고하게 구축하고 있는, 영화와 시와 비평이라는 서로 다른 영토들을 횡단하고 융합하려는 ‘크로스오버 기획’이 생성과 창조와 변이의 분기선들을 촉발할 수 있는, 그야말로 ‘감응의 빛살’을 내뿜을 수 있는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머리에」중에서
모든 존재의 공생과 생명의 평등을 암시하는 자리에서 〈기생충〉은 서구적 사유의 근간을 형성하는, 투쟁과 종합과 발전의 단계적 서사인 변증법적 진보의 사유 모델을 박차고 날아올라,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적 깊이를 확보하는 듯 보인다. 이는 “박사장 가족과 ”기택“ 가족이 맺는 상호 관계를 자본과 임노동의 교환관계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얼룩진 인정투쟁의 관계로만 환원하지 않는 자리에서 확보된다. 그것은 또한 두 가족을 더불어 존재하고 상호 공생할 수밖에 없는 관계, 즉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오랫동안 대대(對待)라는 말로 일컬어져 온 상호의존성, 또는 상보성(complementarity)의 관계로 바라보도록 강제한다. “냄새”라는 미장센이 상징하는 것처럼, 모든 존재는 제 바탕에 사회체제의 상징적 질서를 넘어서 상호 공생할 수밖에 없는 의존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과 임노동의 교환관계를 넘어서는 상호 의존적인 대순환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생충〉이 “냄새”와 “모르스부호”를 통해 암시적 문법으로 강조하려 한 것은 결국 부자와 빈자, 자본과 임노동, 상류층과 하류층이 맺을 수밖에 없는 상호의존성의 필연적 구조이며, 양자의 계급투쟁과 적대감을 넘어설 수 있는 공생의 사유이자 공존의 윤리학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중에서
김수영이 말한 “우리들의 현실”이 50여 년이 흐른 지금-여기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그대로인 “현실”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는 암울한 느낌을 이끌어온다. 2020년대의 “우리들의 현실” 또한 김수영의 시대와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 황폐한 진실에 대한 뼈아픈 자각이 솟아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자각은 ‘한강의 기적’이라는 미사여구가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으로 치장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산업발전의 밑바닥엔 무수한 폐해와 부조리들이 “괴물”처럼 자라나고 있을 것이라는 숨겨진 두려움을 우리 모두에게 안겨주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는 김수영의 산문에서 비롯하는 말이지만, 봉준호의 “봉테일”로 승화된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세계의 시 시장에 출품된 우리의 현대시가 뒤떨어졌다는 낙인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라는 김수영의 말을 봉준호의 영화 〈마더〉에 다시 대입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봉준호는 김수영이 그토록 강조한 “우리들의 현실”, 그 “뒤떨어진 현실”을 “정직”하게 “직시”했을뿐더러, 자신만의 “봉테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중에서
봉준호는 김수영이 말했던 “진정한 현대성의 지향”, 그 “이상한 역설”로서의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를 자신만의 촘촘한 디테일의 그물, 곧 “봉테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현대적인 시인의 긍지는 〈앞섰다는 것〉이 아니라 〈뒤떨어졌다〉는 것을 의식하는 데 있다”라는 김수영의 역설적인 “긍지”를 집요하고 끈덕지게 추구한 자리에서 얻어진 것이 분명해 보인다. “봉준호 장르”라는 신조어 역시 김수영이 예견한 역설적 차원의 “긍지”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추론된다. 한 인터뷰에서 고백한 것처럼, 그는 영화 산업의 종주국이자 종착지일 수밖에 없을 미국 영화의 기성 문법이나 장르 컨벤션들을 모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의 높은 기술적 수준에서 멀찌감치 “뒤떨어졌다”는 사실을 “확고하고 여유 있게” 수용하는 자리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리라.
이와 같은 측면은 봉준호 영화가 할리우드 기존 장르들을 자신만의 장르 융합을 통해 변형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영화, 우리만의 영화’일 수밖에 없을 “봉준호 장르”를 세계 최초로 창안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김수영이 말했던 것처럼, 그는 “세계의 영화(시) 시장에 출품된 우리 영화(시)가 뒤떨어졌다는 낙인을 받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뒤떨어진 현실”을 예술가의 긍지로 승화할 수 있는 그 “이상한 역설”을 충실하게 실천했다고 하겠다.
---「우리의 비애, 우리만의 비애」중에서
〈동사서독; 리덕스〉는 『사조영웅전』의 일부를 가져오면서도, 그 서사적 지력선을 팽팽하게 견인하는 새로운 이야기 매듭과 각색된 인물들의 관계 구도를 빚어놓는다. 그리고 이 구도를 통해, “돈” 또는 물신(fetish)이라는 ‘추상성의 유령’이 모든 인간관계를 지배하면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할 수밖에 없을 현대세계의 페티시즘을 덧입혀 놓은 듯 보인다. 이 영화를 수미일관하게 관통하는 알레고리 문법과 뉘앙스의 미학 역시, 고전적 윤리 규범으로 덧칠해진 무협 서사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초현실주의의 콜라주 기법과 더불어 페티시즘으로 얼룩진 현대세계의 일상적 풍속이 동시에 교차하는 자리에서 온다. 곧 무협 서사와 현대적 콜라주 기법을 횡단하면서 양자를 전혀 다른 문법으로 융합하려는 크로스오버의 번뜩이는 영감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우리 현대인들의 몸에 둔중하게 가라앉아 있을 무수한 페르소나(persona)와 분열적 인격의 모양새를 그려냈던 맥락 역시 이와 같다. 배우 임청하가 열연한 “모용언/모용연”이라는 분열증적 주체(schizophrenic subject)의 캐릭터를 보라. 이 캐릭터는 『사조영웅전』의 시간적 배경을 이루는 저 남송(南宋)의 중세시대를 대리 표상하는 전형으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모용언/모용연”의 분열증이란 상품의 화려한 겉치레와 이미지 마케팅 자체가 또 다른 잉여가치로 둔갑할 수 있는 현대 기술자본주의 감각이 수반하는 인격적 캐릭터이자 내면성의 효과이기 때문이리라. 나아가 최첨단의 기술혁신을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팔아치울 수밖에 없을 소비자본주의 시대, 그 일상적인 물신화 현상이 양산하는 인격체의 자질이자 그 실존의 얼굴에 훨씬 가까울 수밖에 없기에.
---「‘긍지의 날’, 자존의 빛과 그늘 (前)」중에서
어쩌면 〈일대종사〉의 두 주인공처럼 우리 안에 깃든 “실재적 자아”와 “잠재적 자아” 역시, 서로를 그리워하는 연모의 정을 품은 채로 평생을 떨어져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궁이”와 “엽문”은 결국 우리 안에 깃든 “陰/陽”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수영 식으로 말하자면, “설움/긍지”는 서로를 마주 보는 “순환의 원리”를 이룰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꿈속에서”(夢裡) “궁이”(藏花)를 찾아 “동북” 지방의 눈밭을 헤맬 수밖에 없었을(踏雪) “엽문”의 마음결(葉底)을 다시 섬세하게 더듬어보라. 그리고 이 모든 그리움의 모티프를 기획하고 연출한 왕가위와 더불어, 김수영의 마음결을 가로질렀을 음양의 “순환의 원리”를 다시 한번(一度) 제대로 헤아릴 수 있는 크로스오버 비평의 기회(幾回)를 다음 지면으로 약속하자(一約旣訂). 만 겹의 산과 같은 글쓰기의 어려움이 지극히 높고 험준하여 이를 가로막는다고 할지라도(萬山無阻).
---「‘긍지의 날’, 자존의 빛과 그늘 (前)」중에서
「긍지의 날」의 맨 앞머리에 등장하는 “너무나 잘 아는/순환의 원리를 위하여”라는 구절에는 유년 시절부터 한문과 동아시아 고전을 공부해 온 김수영의 실존적 경험이 깊숙이 가라앉아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또한 이 작품 전체를 이끌고 나아가는 예술적 사유의 지력선 역시, 극력(極力)의 상호 작용으로 표상될 수 있을 순환과 역동적 평형의 원리를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이 자명해 보인다. 어쩌면 김수영은 이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는 시간 동안 “설움”과 “긍지”를 음양의 역동적인 상호작용(巽震二卦 皆有下變而成 陰陽以爲陰者 損也. 陰變以爲陽者는 益也.)처럼 느끼면서, 산택손 괘와 풍뢰익 괘가 만드는 상호 순환(盛衰損益 如循環 損極必益 理之自然 益所以繼損也.)과 같은 맥락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 “순환”의 이미지를 뒤따라서 “나는 피로하였고/또 나는/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라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이미지들이 곧바로 등장하는 것 역시, 표층적인 차원의 축자적 의미가 아니라 그 뒷면을 가로지르는 시간의 추이와 이에 따른 극력(極力)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으로 읽는 것이 적확할 듯하다. 특히 “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라는 다음 구절의 맥락을 곰곰이 되새겨보면, “영원히 피로할 것이기에”라는 이미지가 왜 “긍지의 날”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지를 좀 더 깊게 감득할 수 있을 듯 보인다.
---「‘긍지의 날’, 자존의 빛과 그늘 (後)」중에서
이 글의 초점이 〈동사서독; 리덕스〉의 여덟 인물 가운데 “홍칠”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 역시, “긍지”가 제 뒷면에 거느릴 수밖에 없을 “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긍지”란 “설움”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한, 그야말로 발전과 상승을 이미 도모해버린 자의 정신적 진보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설움”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극력(極力)이자 변곡점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생각을 김수영과 왕가위는 예술적 사유의 공분모로 취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들의 텍스트는 고정된 장르의 테두리를 박차고 날아올라, 시와 영화, 그리고 예술 장르 전체가 감응(感應)을 자기 존재의 근본 바탕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근거를 탁월하게 예시해 보여주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시와 영화라는 예술 장르의 협소한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크로스오버의 향연이 태어나리라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자명한 것이겠지만.
---「‘긍지의 날’, 자존의 빛과 그늘 (後)」중에서
특히 ‘대동이란 유가의 이상사회 즉 공공사회의 상징적 용어’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차별이나 구별 없이 전체 사회가 한 가족으로 이뤄진 곳이라고 여기는 사상’임을 염두에 둔다면, 김수영의 「사랑의 변주곡」은 이러한 대동(大同)을 인(仁)의 구체적 실현 양태인 “사랑”의 궁극적 지향점이자, 시인 자신의 염원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김수영의 이러한 염원은 그가 말하는 “사랑”이 “혁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와 근거를 이루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의 시와 문학에 깃들일 수밖에 없는 사회성과 정치성의 측면을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맥락과 계기를 이룬다고 하겠다.
---「“사랑”, 상성(相成)으로서의 인(仁)」중에서
이처럼 “천지만물”의 감응과 감통의 관계를 언술하고 있는 『주역』의 괘로는 “풍택중부(風澤中浮)”와 “택산함(澤山咸)”을 예시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풍택중부” 괘사에서 등장하는 “中孚는 豚魚면 吉하니 利涉大川하고 利貞하니라.(中孚는 믿음이 돼지와 물고기에 미치면 吉하니, 大川을 건넘이 이롭다)”는 구절은 〈옥자〉에서 형상화된 인간 “미자”와 동물 “옥자” 사이의 감응(感應) 현상을 좀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구절에 관한 무수한 주석 가운데서도, 조선 시대 유학자들에게 표준적 해석의 준거점으로 기능해왔던 정이천의 주석을 참조하면, 진정한 “감응”은 “가장 조급하고 어두운 물건”인 “돼지와 물고기”에게까지 미칠 수 있는 진실한 믿음(中孚)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인간과 다른 뭇 존재와의 구분이나 차별을 넘어서, 또는 서로 다른 그 모든 존재 사이의 위계와 차이를 가로지르면서, “천지만물”과 우주 삼라만상으로 퍼져나가는 힘과 느낌과 분위기의 상호 침투이자 융합 현상을 뜻하는 용어가 “감응”임을 좀 더 명료하게 숙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실상 〈옥자〉에서 “미자”와 “옥자” 사이의 감응 관계는 매우 빈번하게 나타날뿐더러 다양한 미장센(mise-en-scene)을 통해 변주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감응(感應)의 우주, 時中(시중)의 윤리」중에서
인용 문장들에는 “예술” 또는 하나의 “예술”로서 “시”의 존재론적 가치와 위상을 자유롭게 기술하고자 하는 예술 에세이의 특질들이 주름져 있다. 이들은 엄격한 개념적 규정이나 논리적 체계와 인과관계를 정교하게 구축하고 활용하려는 개념적-논증적 글쓰기의 모델을 추구하지 않는다. 도리어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표현들과 그 유비(analogy) 관계의 상호 조명을 통해, 각각이 건네려고 하는 사유와 미감들이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심미적-비유적 글쓰기를 표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결국 『우물에서 하늘 보기』가 거시적인 범주에서 보면 비평집으로 수렴될 것이 틀림없지만, 각각의 문장들이 이어지면서 어떤 미감들을 발산하거나 그 사유의 매듭들이 서로를 비추는 미시적인 지각 단위에서 보면 심미적 비평, 또는 예술 에세이의 스타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숭고의 넓이, 기억의 깊이」중에서
카프가 위기에 봉착했던 그 시절부터 임화가 제시해왔던 “혁명적 낭만주의”를 비롯하여, 김남천의 「물」을 비판하는 논리적 거점이었던 주인공-성격-사상이라는 가치 규준은 “주관주의적 편향”이라는 한계를 품은 것이긴 했지만, “신성한 잉여”라는 새로운 담론의 방향성을 낳을 수 있었던 어떤 “신성한” 태반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아니, “신성한 잉여”라는 언표는 일제 말기를 횡행했던 식민지 파시즘 체제로 휘말려 들어가지 않으려는 임화의 내면적 고투가 격렬하게 응집된 하나의 단자(monad)일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임화가 줄곧 신봉해 왔던 마르크스주의 세계관과 역사철학의 경직된 도식에서 멀찌감치 벗어난 자리에서 산출된 것이자, 그것의 창조적 핵심인 진보주의 역사관을 고스란히 견지하고 있었음을 명징하게 방증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 자리에서 당대 비평의 이론적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탈근대적 사유의 지평을 미리 선취하는 바디우적 의미의 ‘진리/사건’이 현현했던 것으로 추론된다.
---「“신성한 잉여”, 진리-사건으로서의 임화 비평」중에서
정지용은 「호랑나븨」를 통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당신들의 ‘미친 사랑의 노래’를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동양화처럼 그렸습니다. 그리고 시라는 예술 양식이 반드시 지녀야 할 저 ‘침묵의 공간’을 드러난 풍경들 사이사이에서 빚음으로써, 당신들의 보이지 않는 지독한 사랑 이야기를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어쩌면 당신들이 선택한 저 무서운 사랑의 길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현상에 이미 깃들어있는 양면가치이자, 그 상반된 운동이 태어나게 하는 생의 역동적인 리듬 자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표층적으로는 생성이고 채움이지만 그 심층에는 소멸과 비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시인의 통찰은 당신들이 끝까지 밀고 나간 극단적인 사랑의 벡터를 「호랑나븨」라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이끌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름조차 없”는 “畵家”에게」중에서
이처럼 우리는 “그리움”에서 또 다른 “사랑”의 얼굴, ‘방법으로서의 유토피아’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곤혹과 열패감의 수렁으로 내던져버렸던, 그리하여 존재론적 고독과 정신적 시련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그 참담한 절망의 얼굴과 마주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거래 관계와 교환가치의 시스템이 권장하는 안전한 ‘삶/사랑’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바로 그 순간 맞이하게 될 값비싼 실존의 대가일 것이다. 이 시의 맨 끝자락 첫 행에 아로새겨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던 무른 벌레를 눌러 죽였다”라는 이미지가 풍기는 다채로운 뉘앙스 역시 이와 같은 자리에서 온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리움”에 들러붙을 수 있을 온갖 위험과 부정적 감정 상태들로 인해, “사랑이라 부르던 무른 벌레를 눌러 죽이”는, 따라서 안전한 거래 관계로서의 ‘삶/사랑’만을 추종하게 된 “우리” 시대의 풍속도를 알레고리 기법으로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리움”을 “제 굴혈”을 맴도는 자기 회귀적인 것으로 전제할 때, 그것은 타인과 사회로 열리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무른 벌레를 눌러 죽일” 때 움터 오르는 나르시시즘의 덫, 그것을 경계하고 풍자하려는 이미지로도 읽힌다.
---「“그리움”, 방법으로서의 유토피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