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종성은 주로 탈식민주의와 문화연구를 필두로 한 문화혼종성의 용법과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이질적인 문화들이 뒤섞인다는 혼종성에 대한 강력한 이미지로 인해 북한과 같이 폐쇄적이고 동질적인 체제에 이 개념이 과연 적실성이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혼종성이라는 개념은 서로 다른 문화의 섞임이라는 협소한 차원을 넘어 전 지구화와 로컬의 상호 관계, 경계와 접촉 및 이동을 통한 문화변용의 과정,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가로지르는 포스트 사회주의 체제 사회구성체의 복잡성, 이질적인 요소들을 접합시키는 담론 정치의 기술 등, 실로 다양한 분야와 주제를 포괄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 p.24, 「북한 사회 인식의 습속과 혼종성이라는 문제 설정」 중에서
프로파간다라는 시선이 수반하는 ‘앎’이 북의 문예를 다만 자기 확신의 한 계기로 이용할 뿐이라면,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에 대한 자각에 의해 추동된다. 북조선의 생활 속으로 직접 들어가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문예는 거기에 실현된 세계(어버이의 나라)와 그 거주자들(어버이수령의 아들딸, ‘그이의 혁명전사’)의 삶과 꿈에 대한 사회학적 이해의 가능성을 담보해 주는 핵심 자료라는 위상을 갖는다.
--- p.68, 「프로파간다라는 시선을 넘어서」 중에서
아프리카 사회를 배경으로 해 탄생한 비공식경제 개념은 이렇듯 반세기 동안 여러 대륙을 거쳐 한반도의 북녘에 대한 연구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개별 사회와 시대의 특수성을 고려해 학술적 개념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는 것 자체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비공식경제에 관한 이론 틀은 지난 50년 동안 그 개념을 활용해 설명했던 여러 대륙, 많은 국가의 경제 및 사회 체제가 변화한 만큼이나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50년 전 가나(Ghana)를 배경으로 고안된 이 개념을 2021년 북중 접경지역이나 북한 내부의 시장경제 요소를 설명하는 데도 적실하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 개념을 통해 북한 내 정중동(靜中動)의 흐름 속에서 사회경제 체제 변화와 관련한 보다 풍부한 설명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비공식경제론의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에 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 p.111, 「체제 이행 사회에 대한 연구와 비공식경제」 중에서
옥스퍼드 영어 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에 따르면 라틴어 히브리다(hibrida)에서 유래한 하이브리드(hybrid)라는 용어는 ‘길들여진 암퇘지와 야생 수퇘지의 새끼’를 지칭한다. 생물학적 개념으로서 이것은 혼혈, 잡종, 잡종견 등을 의미했으며 ‘불순함’과 열등함을 나타냈다. 이 말은 정치적 의미로 가득 찬 용어가 되어버렸는데, 19세기 과학적 인종주의의 수사학에서 열렬히 차용된 바 있는, 다인종 간 출산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찬 담론 형성에 활용되었다. 이종교배는 백인우월주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개념이다.
--- p.148, 「포스트 사회주의 하이브리드」 중에서
기본적으로, ‘주체’라는 단어는 주체(subjectivity)성의 조건을 지칭하는 말이며, 북한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주인/주됨 주”와 “몸 체”로 이루어진 이 단어는 한자 문화권에서 흔하게 쓰인다[중국어 주티(zhuti), 일본어 슈타이(shutai), 베트남어 추테(ch?th?) 등]. 따라서 북한에서 쓰이는 개념을 참조하지 않고도,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다”와 같은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 p.175, 「전체이기에 부서지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