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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과 주체

사카이 나오키 저 / 후지이 다케시 역 | 이산 | 2005년 06월 18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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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5년 06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376쪽 | 574g | 153*224*30mm
ISBN13 9788987608464
ISBN10 8987608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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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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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 후지이 다케시(藤井たけし)
1972년 일본 미에(三重) 현에서 태어났다. 교토(京都) 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오사카(大阪) 대학 대학원 일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성균관대학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전공은 한국현대사. 주요 논문으로「切れて繫がる: 朝鮮戰爭における『殘された人』」「돌아온 '국민': 제대군인들의 전후」등이 있다. 현재 성균관대 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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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한국 친구를 통해서 <번역과 주체>가 한국어로 출판된다는 소식을 듣고 공포와 더불어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기분입니다. 한국독자들이 나의 논의를 읽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임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과연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질지, 나아가 어떤 비판을 받게 될지 빨리 알고 싶다, 하지만 무섭다 하는 식으로 차분히 있을 수 없게 하는 기대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는 피할 수 없는 공포와 불안으로 한국독자들과 나 사이에, 어떤 국민과 다른 국민 사이의, 이 책에서 사용한 말로 표현하자면 쌍형상적인 관계로는 처리할 수 없는 서로의 유대를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어판 번역출판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불가사의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음을 꼭 말해두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번역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한 이래 연쇄되는 번역의 이미지가 잠시도 내 머리를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번역을 단지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로 변환되어 두 개의 언어나 두 개의 집단이라는 이항관계 속에서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제3항, 제4항으로 무한히 증식해가는 연쇄로서 생각하는 버릇 같은 것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소통모델로 번역을 생각하는 것에 내가 순응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이런 것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연쇄는 꼭 하나의 민족어로부터 다른 민족어로의 연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서 번역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기존의 번역을 수정하고 고쳐 쓰는 작업의 연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편집자를 통해 한국어판 출판소식을 접했을 때 내가 오랫동안 품어왔던 번역의 이미지가 이제 실현되는구나 하는 느낌이 문득 들었습니다. 번역의 번역의 번역……이라는 연쇄가 바로 실현되고 있다는 느낌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 수록된 글은 대부분 처음 영어로 쓰였고 그것을 내가 직접 일본어로 번역했다는 내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원래 일본어로 썼던 글을 거꾸로 영어로 고쳐 쓴 것도 있습니다. 지금 그런 글들이 번역자의 손을 거쳐 한국어로 번역되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남몰래 품어왔던 기대의 실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내가 쓴 글이 번역되었을 때 어떻게 읽힐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영어 독자들을 주된 대상으로 쓸 수도, 일본 독자들을 주된 대상으로 쓸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미지의, 내가 모르는 말을 하는 독자들에게 말을 걸고 싶었습니다. 내 언어 속에서 내가 말하려는 것이 완결된다는 환상을 나는 가질 수 없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진지하게 말한다는 것은, 민족이나 국민으로 표시된 안전권에서 떠나는 것, 그러한 안전권에 의해 보장된 안심이나 연대감에 작별인사를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번역은 나에게 사활의 문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작별인사를 할 상대인 일본어나 영어가 마치 명료하게 구성된 공동체인 것처럼 생각하는 믿음 자체는 엄밀히 검토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 언어와 민족이 등치되고 결국에는 국민의 동일성(identity)의 상징이 되고 마는가. 내가 번역과 주체라는 문제와 마주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에 박사논문인 "Voices of the Past"(<과거의 목소리들>)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Voices of the Past"는 18세기에 일본열도의 일부 지역에서 처음으로 일본어와 민족으로서의 일본인이라는 의식이 소수 지식인들에 의해 공상되었을 때 그러한 공상을 가능케 한 담론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고찰한 논문인데, 거기서는 번역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띠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번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표상 메커니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언어가 어떻게 상상되는지를 아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상상되는 한에서의 언어, 통일체로 상상되는 한에서 존재하게 되는 언어. 그것은 언어의 환상성이나 허구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 통일체가 상상되는 한, 언어는 확고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렇다면 언어의 존재보다 언어의 통일성이 어떻게 상상되는가 하는 질문이 앞설 것입니다. 이에 언어의 통일성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어떤 메커니즘이 필요한지를 생각하기 위해 번역과 쌍형상화라는 논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먼저 번역행위와 번역의 표상이라는 구별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간단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민족이나 민족언어는 선사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초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어떤 시기에 출현한 역사적 시작을 가진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과거의 목소리들>에서 나는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정면으로 상식을 거스르는 것으로, 언어의 역사적 출현을 생각하는 것 자체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나 역시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공상만 해보아도,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언어가 생겨나는 그런 사태를 상정(想定)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나 자기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들이 가르쳐주는 것이 아닌 언어를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에 개별적인 단어나 발화가 아니라, 언어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게 됩니다.

도대체 언어라는 것으로 우리는 무엇을 떠올렸을까. 단어, 구절이나 개별적 발화가 아니라 새삼스레 언어라고 할 때, 우리는 단편적인 언어적 사상(事象)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무언가 체계적인 말의 생산을 제어하는 큰 메커니즘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어나 일본어의 단어를 안다고 해서 한국어나 일본어를 할 줄 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어는 단편적인 것들의 집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통상 한국어나 일본어를 한 묶음의 유기적 통일체로 상정하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한 묶음의 유기적 통일체를 표상할 수 있는 것이 어떤 메커니즘에 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고찰해본 적이 없습니다.

언어란 민족 혹은 국민이라고 불리는 집단 속에 일반적으로 두루 존재하는 에테르와 같은 것으로, 이 편재체(遍在體)의 내면화 여부로 개인의 민족적 동일성/정체성이나 국민적 동일성/정체성이 결정된다고들 생각합니다. 한국어에 관한 단편적 지식을 가지고서는 한국인으로서의 동일성/정체성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한국어 네이티브 스피커와 한국어를 습득한 외국인의 차이는, 본래적이고 토착적인 한국어 네이티브 스피커는 한국어를 공기처럼 느끼며 사는 반면에 한국어를 습득한 외국인은 대상으로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서 찾는 것이 보통인 것 같습니다. 그럼 이러한 토착적인 네이티브 스피커는 한국어(또는 일본어)의 통일성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도대체 언어 통일체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러한 상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시금 고찰하기 위해서는 번역이 고찰되어야 합니다. 번역 없이는 이런 자신의 민족어가 갖고 있는 통일성을 의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번역의 표상 없이는 자신의 민족어를 표상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국어를 못하기 때문에 탄탄한 체험적 뒷받침이 나에게는 없지만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에는 많은 공통적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상이한 표기시스템들이 공존했던 점이라든지 중국의 문명적 우위 아래서 발전해온 언어라는 점 등이 바로 떠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명론적 설명에는 함정이 있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유기적인 통일성을 지닌 중국어의 지배 아래서 똑같이 유기적인 통일성을 지닌 한국어나 일본어가 억압되었다는 시나리오를 무심결에 환기시키기 때문입니다. 물론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나 일본열도의 지식인들은 한문으로 쓰고 한시로 자신의 교양을 과시하려 했지만, 그러한 상황을 어떤 민족어와 다른 민족어 사이의 지배로서 이항적으로 이해해도 되는 것일까요? 근대 식민지 관계처럼 민족어 의식을 가진 국민이 다른 집단을 지배하고 피지배집단에 '국어'를 강요함으로써 그 집단의 민족어를 억압한다는 도식으로 이 지배관계를 이해해도 좋을까요? 이러한 이해는 오히려 식민지배의 근대성을 은폐하는 것은 아닐까요?

도대체 중국어라는 실체를 당시 사람들은 상정했을까요? 그런 점에서 18세기 일본의 몇몇 지역의 지식인들이 중국의 언어에 다시 주의를 돌렸을 때, 그것이 동시에 일본어라는 언어통일체를 의식하는 것이기도 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물론 중국의 언어라고 해도 그들은 고대중국의 순수언어를 상정했지, 동시대의, 즉 18세기의 중국은 어떤 균질적이고 단일한 중국어라고 부를 만한 언어를 발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열도에서도 그러한 단일한 일본어를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대중국과 고대일본에 각각 신화적인 순수언어를 상정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민족어의 통일성 자체를 의식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민족어의 발견은, 당시 한문이라고 불리던 고전중국어 문체(오늘날 영어로는 literary chinese라고 부릅니다)의 보편적인 사용을 포기하고 일상회화에서 사용되는 구어에 의한 고전 이해를 장려하는 지적 운동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즉 고대중국 또는 고대일본에서 산출된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번역이 필요하다는 것을 소수의 지식인들이 깨달은 것입니다.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춘추전국시대에서 청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전이 일본열도에 소개되었는데 이런 고전들이 일본문자로 번역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16·17세기에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에 의한 유럽 책들의 번역이 이루어졌지만 한문 문헌의 번역이라는 발상은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일본 특유의 문자로 생각되는 히라가나나 가타카나는 바로 가나(?名)라는 한자 단어가 보여주는 대로 마나(眞名)와 짝을 이루는 개념으로, 이것은 본래적 표기문자에 대해 일시적인 가짜 표기문자라는 의미를 부여받았습니다.(히라가나나 가타카나의 역사는 이런 점에서 처음부터 한자와 다르다는 분리의식을 분명히 가졌던 한글의 역사와는 약간 다른 듯합니다.) 한(漢)이라는 문자가 사용되면서도 히라가나 및 가타카나와 한자의 관계는 한 민족의 문자와 다른 민족의 문자라는 대비로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민족어로부터 다른 민족어로의 번역이라는 발상은 번역의 실천계(regime)가 사람들을 사로잡고 번역행위가 일정한 방식으로 표상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번역의 실천계는 언어적인 이해의 어려움을, 마치 그것이 하나의 언어와 다른 언어 사이의 공간적 단절인 것처럼 공상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렇게 해서 번역이라는 작업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교섭에서의 약분불가능성을 하나의 통일체와 다른 통일체 사이의 균열인 것처럼 생각하는 습관이 의심을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다른 언어를 상이한 짝을 이루는 통일체로 표상할 수 있게 되면 언어의 비교가 가능해지고, 거기서 일본어의 성격을 연구하는 학문이 가능해집니다. 또 예를 들어 와카(和歌, 일본의 전통적 정형시)와 한시는 분명히 다른 어구들을 사용하며 다른 표기양식을 따르는데, 이 두 개가 장르적 차이가 아니라 두 개의 언어통일체의 차이로 생각되게 됩니다. 그때까지는 같은 인물이 때로는 와카를 읊고 또 때로는 한시를 짓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는데, 이후에는 와카가 일본어에 특유한 표현이고 한시는 중국어에 특유한 표현 형태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가능해집니다. 즉, 와카가 일본어문학인 반면에 한시는 중국어문학이라는 식의 새로운 분류법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번역의 실천계가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퍼진 것이 18세기의 일이고, 또한 이 시기에 새로운 분류법이 생깁니다. 물론 그 전에도 일본 와카의 어법이나 고전언어에 대한 연구는 있었지만 고대 일본어의 음운·문법 연구가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게 된 때는 18세기입니다. 이른바 국학이라고 불리는 운동이 일었던 것입니다. 민족어의 표상이 가능해짐과 동시에 민족을 유기적인 통일성을 지닌 것으로 상상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즉 번역의 실천계의 출현과 일본어나 일본인이라는 민족-언어통일체의 출현은 새로운 분류법의 성립을 매개로 밀접하게 결부되었을 것입니다.

민족-언어통일체의 성립을 곧바로 국민국가 성립과 결부시킬 수는 없지만, 민족-언어통일체의 성립에서 어떤 근대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유럽에서 전세계로 유출되는 문명화과정으로서의 근대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근대성은 18세기 일본열도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단 이런 근대성을 무제한적으로 구가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국민국가라는 제도가 그렇듯이 민족-언어통일체는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을 가능케 하고 자본주의 전개의 조건이 되어왔는데, 동시에 인종주의나 총력전으로 상징되는 근대전쟁의, 전근대와는 비교도 안되는 잔학성을 가능케 한 역사적 구성체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나는 번역을 통하지 않고 한국독자들과 한문으로 논의하는 것도 필담으로 토론하는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번역과 주체>가 지금 이렇게 번역된다는 것 자체가 나와 이 번역의 독자들 사이의 관계를 민족과 민족 사이의 관계로 만들어버리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오랜 교류를 생각할 때, 이 번역 자체가 근대의 표징(表徵)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번역이 민족과 민족 사이의 쌍형상화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 또한 나는 믿습니다. 이 책에서 번역자가 차지하는 주체적 위치에 관해 이야기했듯이, 번역자는 균질언어적으로 말할 수 없으며 번역자의 행위는 항상 쌍형상화 도식을 배반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어와 일본어라는 두 개의 민족어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양의적인 입장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번역자 후지이 다케시 씨 덕분에, 한국인 대 미국인 또는 한국인 대 일본인이라는 식의 국민 대 국민 또는 민족 대 민족이라는 관계와는 약간 다른 관계를 독자들과 나 사이에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약간 다른 관계를 단순히 친구 사이라고 부를까 내심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번역의 단서를 만들어주신 김경원 씨께 감사의 말을 하고 싶습니다.

2005년 5월 이사카에서
사카이 나오키
--- 한국어판 서문
옮긴이의 말
이 책은 외국인이 외국어로 쓰고 외국인이 외국어로 옮긴, '외국인;을 위한 불순한 책이다. 공저를 포함해 사카이 나오키의 책이 한국에서 출판되는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임지현과의 대담집인 <오만과 편견>,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엮은 논문집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 일본에서 출판된 책을 번역한 <사산되는 일본어·일본인> 등을 통해 그 이름이 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에 여기서 굳이 사카이 나오키라는 사람에 대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번역자로서 갖고 있는 한 가지 기우는, 저자가 이미 어느 정도 알려진 관계로, 거두절미하고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라는 식의 단순한 표상에 의해 그의 글이 안이하게 '이해'되면 어쩌나 하는 점이다.

그런데 사카이가 실제로 이 책을 통해 제시하는 것은 '열린 민족주의'나 세계시민주의 같은, 이른바 모범답안과는 거리가 멀다. 사카이는 사회의 이미지로서 "외국인들의 비집성적 공동체"라는 파격적인 이념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외국인'이라는 것은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말이 통할지 알 수 없는 미지의 타자를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대화라는 실천적 관계는 결코 어떤 일정한 결과를 보장하는 행위가 아니며, 우리는 일상의 대화 속에서 항상 '외국인'을 만나고 자기 자신 또한 '외국인'이 된다.

사카이가 인식론적 주관과 구별해서 도입하는 실천의 행위체로서의 主體란 바로 이런 '외국인'의 별명이기도 하다. subject라는 말 안에는 이미 主體라는 '외국인'이 살고 있는 것이다. 主體는 실천을 통해서 항상 주관의 의도를 넘어 뜻밖의 무언가를 낳음으로써 주관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침범한다. 말실수를 하고 오해를 하며 엉뚱한 행동으로 자꾸 맥이 끊기는, 매끄럽지 못한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런 主體들이다. 하지만 경계선이 흐려지는 공포, 자아가 상실되는 공포에 직면한 주관은 외국인이라는 실정적 형상을 만듦으로써 내국인이라는 내부성을 확보하려 한다. 서양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동양의 동양화가 필요했다는 사이드의 지적처럼, 말이 통하고 동일한 생각을 가진다고 상정되는 내국인이라는 ˙형˙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외국인이라는 형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부제에 명기된 것이 일본이 아니라 '일본'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령 일본을 초역사적인 실체로 보는 관점을 피하기 위해 사카이는 '지금 일본열도라고 불리는 지역'이라고 표현하는 등 아주 조심스럽게 대상을 다루는데, 그 이유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섬과 담론으로서의 '일본'을 분명히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일본'은 사카이가 쌍형상화라고 명명한 도식, 즉 객체를 정립함으로써 그것과 짝을 이루는 형태로 주체를 정립하는 방식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내셔널리즘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흔히 나를 먼저 인정해야 남을 인정할 수 있다는 식의 말을 하는데, 사카이의 지적은 '남'이 있기 전에 '나'가 먼저 있다는 인식의 도착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문화적 국민주의자인 와쓰지 데쓰로의 행적을 논하면서 사카이가 보여주었듯이, 쌍형상화 도식은 '남'과 '나'를 인식론적으로 분리함으로써 그 사이에 무수히 존재하는 다양한 실천적 관계들을 부인한다. 와쓰지의 경우에서 말한다면, 그는 상하이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동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눈앞에 있는 중국인들 쪽으로 자기 스스로가 건너갈 가능성 또한 부인했다. 엄밀히 말해 사카이가 이 책을 통해서 비판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이 쌍형상화 도식이며, 내셔널리즘은 여기서 파생된 하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실천이며 그 속에서 발생하는 되기/생성변화의 가능성이다.

번역작업을 끝마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의 지원과 격려가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그 중 몇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먼저 영어권 가까이 가본 적도 없는 나의 번역에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오역들을 지적해준 김소연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외국인을 역자로 기용한다는 어려운 결단을 내리고, 매끄럽지 못한 원고를 꼼꼼히 읽고 다듬어주신 이산출판사 강인황·문현숙 사장님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나로 하여금 외국인으로 살게 만들고 이런 번역까지 하도록 길이 되어준 윤진희에게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끊임없이 균질적이기를 요구하는 세계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역자 멋대로 이 책을 바친다.

2005년 5월 어느 날 밤에
---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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