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은 고독한 작업이다. 오랜 시간 홀로 책상머리를 지켜야 한다. 그런 갑갑함을 달래기 위해 많은 작곡가가 신발 끈을 매고 밖으로 나갔다. 말러는 등산용 지팡이를 들고 알프스 기슭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고, 브람스는 이탈리아로 훌쩍 건너가 가르다 호숫가나 코모 호숫가를 유유자적 걷고는 했다. (...) 물론 작곡가들이 만끽한 탁 트인 공간과 인상적인 풍광은 자연히 그들의 음악에도 녹아들었다. 영국의 초록빛 구릉지대부터 푸르른 북아메리카 대평원까지, 우리를 아름다운 경관에 흠뻑 빠져들게 할 몇 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갑갑함」중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자연을 고스란히 느끼고 싶다면, 에이노유하니 라우타바라의 1972년 작품 〈북극의 노래〉를 들어보자. 이 핀란드 작곡가는 자연의 새소리를 악기로 재현하는 대신 미리 녹음한 실제 북극의 다양한 새소리에 관현악 연주를 덧입히는 방식을 택했다. ‘습지대’, ‘멜랑콜리’, ‘백조 떼의 이주’의 3개 악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는 해변종다리 등의 바닷새 소리가 핀란드 툰드라의 황량한 풍경, 북극의 숲과 얼어붙은 호수를 휩쓰는 매서운 바람을 연상시키는 광막한 관현악 선율과 한데 어우러진다.
---「도시에의 환멸」중에서
잠들기 어려워하는 현대인에게 더 나은, 시대적으로도 더 가까운 처방이 있다. 그렇다, 클래식 음악은 길고 잔잔한 교향곡 악장들부터 최면을 걸듯 단조로운 선율이 끝없이 반복되는 미니멀리즘 작품까지 실로 광범위한 ‘수면용’ 음악을 제공한다. (...) 막스 리히터는 숫제 듣는 사람을 잠재우고 깨지 않게 할 목적으로 무려 31악장으로 구성된 8시간짜리 실험적인 작품 〈슬립〉을 만들었다. (...) 심지어 〈슬립〉은 과학을 등에 업고 탄생한 작품이다. 리히터는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의 자문을 통해 밤잠 시간의 느린 뇌파를 반영, 반복되는 저주파 음으로 이루어진 음악을 구성했다. 몇 시간이 지나면 고주파 음이 청중을 상쾌하게 깨운다.
---「불면」중에서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마치 사랑의 교본 같다. 〈로미오와 줄리엣 환상 서곡〉의 감각적인 주주제에 표현된 첫사랑의 열기는 얼마나 뜨거우며,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편지 장면’의 희망에 찬 사랑 고백은 또 얼마나 열렬한가! 그러나 정작 이 러시아 작곡가는 완전한 절망 속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을 썼다. 보수적인 19세기 러시아에서 억압받는 동성애자로 살았던 그는 사랑에의 희망을 전부 잃은 채 말년을 맞이했다.
---「상심 1」중에서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푸가에 집착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모든 악기로 연주하는 모든 형식의 음악을 작곡했다. 1,000편이 넘는 작품을 쓰면서 소나타, 협주곡, 칸타타, 미사곡, 전주곡, 파르티타, 토카타 등 다루지 않은 형식이 없을 정도지만, 그는 그중에서도 단연 푸가를 가장 많이 썼다. (...)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과 2권의 전주곡과 푸가, 대부분의 파이프 오르간 작품은 물론이고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집〉, 첼로 모음곡, 관현악 모음곡에도 푸가가 있다. (...) 바흐의 음악은 집착이 위대한 결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증거다. 단, 그 집착을 올바른 방향으로 조종하기만 하면 된다.
---「집착」중에서
평생 사랑의 결실을 본 적 없었던 요하네스 브람스는 자신의 내밀한 욕망을 음악에 쏟아부었으며, 특히 〈피아노 4중주 제3번〉에 저명한 피아니스트요 작곡가이자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인 클라라를 향한 감정을 응축해 담았다. 서글픈 탄식으로 시작하는 1악장은 내내 ‘클라라’를 애절하게 외쳐 부르는 듯하다. 슈만이 작고한 뒤 브람스와 클라라는 부쩍 가까워졌으나, 두 사람은 끝까지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전해진다. 클라라는 1896년에 사망했고 그로부터 1년 뒤 브람스도 세상을 등졌다. 브람스는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다.
---「짝사랑」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