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0032) 갈현(葛玄)
갈현은 자가 효선(孝先)이다. 좌원방(左元放 : 좌자)에게서 ≪구단금액선경(九丹金液仙經)≫을 받았으나 미처 단약을 만들지는 못했으며, 늘 창출(蒼朮)을 복용했다. 특히 병을 치료하는 데 능했으며, 귀신이나 도깨비 등이 모두 정체를 드러내면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는 곡식을 끊고서도 몇 년간 배고프지 않을 수 있었으며, 장작더미를 쌓아 불을 피우고서 그 위에 앉아 있을 수도 있었는데 장작이 다 타도록 옷이나 관(冠)이 그을리지 않았다. 어떤 때는 술을 한 곡(斛)이나 마시고 깊은 산골짜기 샘물 속에 들어가 자다가 술이 깨면 나오기도 했는데, 몸이 전혀 젖지 않았다. (중략)
한번은 갈현이 손님과 마주 앉아 식사를 했는데, 식사를 마치고 양치질을 했더니 입 안에 있던 밥알들이 모두 커다란 벌 수백 마리로 변해 소리를 내며 날아다녔으며, 한참이 지나 다시 입을 벌리자 벌들이 도로 입 속으로 날아들어 갔다. 갈현이 그것을 씹으니 본래 밥알이었다. 또 갈현이 손으로 평상을 두드리면 두꺼비를 비롯한 각종 곤충·새·제비·참새·물고기·자라 등이 나왔고, 갈현이 춤을 추게 하면 모두 사람처럼 박자에 맞춰 춤을 추다가 갈현이 중지시키면 즉시 멈추었다. 갈현은 겨울에 싱싱한 참외를 차렸으며, 여름에 얼음과 눈을 대접했다. 또 수십 냥의 돈을 꺼내 사람들에게 우물 속으로 던져 넣게 했는데, 천천히 그 위에 그릇을 놓고 돈을 불러 나오게 하면 우물 속에서 하나하나 날아 나와 모두 그릇 속으로 들어갔다. 또 갈현이 손님을 위해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술잔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술잔이 저절로 그 사람 앞으로 갔으며, 간혹 다 마시지 않으면 술잔 역시 옮겨 가지 않았다. (중략)
어느 날 갈현이 제자 장대언(張大言)에게 말했다.
“나는 단약을 만들 겨를이 없었는데, 이제 마땅히 시해(尸解)해야 하니, 8월 13일 정오에 떠날 것이다.”
기일이 되자 갈현은 의관을 갖추고 방에 들어가 누운 후에 숨을 거두었는데, 안색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미 : 시해한 것이다. 제자들이 향을 피우고 그의 시신을 사흘 동안 지켰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큰바람이 일어나 집이 들리고 나무가 꺾이며 천둥 같은 소리가 나더니 한참 후에 바람이 멎었다. 그사이에 갈현의 시신은 사라졌고, 침상 위에 남은 옷만 보였으며 허리띠도 풀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침에 이웃집에 물어보니, 이웃 사람은 간밤에 큰바람이 전혀 불지 않았다고 말했다. 바람은 그 집에서만 불었으며, 울타리와 나무가 모두 부러져 있었다.
3-5(0040) 곽문(郭文)
곽문은 자가 문거(文擧)이고 낙양(洛陽) 사람이다. 여항(餘杭)의 천주산(天柱山)에 은거하면서 간혹 커다란 절벽 바위에 기거하기도 했다. 태화진인(太和眞人)이 일찍이 그의 석실에 강림해 충진지도(?眞之道)를 전수해 주었다. 곽문은 종적을 감춘 채 은밀히 수련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 어느 날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석실 앞으로 왔는데, 마치 무언가 말할 게 있는 것 같았다. 곽문은 손으로 호랑이의 목구멍 속을 더듬어 뼈를 발견하고 뽑아 주었다. 이때부터 호랑이는 늘 곽문의 주위에서 유순하게 지냈고, 곽문이 산을 나갈 때면 호랑이도 반드시 따라갔다. 성읍의 시장에 있을 때도 호랑이는 머리를 숙인 채 따라다니면서 마치 양이나 개처럼 감히 난폭하게 굴지 않았다. 미 : 호랑이도 은혜를 갚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간혹 서책을 그 등에 올려놓아도 그대로 지고 다녔다. 곽문이 한번은 나무 열매와 대나무 잎을 따서 소금과 쌀로 바꾸려고 대광주리 안에 담았는데, 호랑이가 그것을 등에 지고 따라나섰다. 진(晉)나라 황제가 그 소문을 듣고 곽문을 대궐로 불러들여 물었다.
“선생은 호랑이를 길들이는 무슨 비법이라도 가지고 있소?”
곽문이 대답했다.
“저절로 그리되었습니다. 사람이 짐승을 해칠 마음이 없고 호랑이 역시 사람을 해칠 뜻이 없으니, 무슨 비법이 필요하겠습니까? 나를 어루만져 주면 임금이 되니 그때는 호랑이가 백성처럼 유순해지고, 나를 학대하면 원수가 되니 그때는 백성이 호랑이처럼 사나워집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과 호랑이를 길들이는 것에 또한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황제는 그의 말을 높이 사서 관직을 내렸으나 그는 나아가지 않고 오정산(鰲亭山)으로 돌아가 은거하다가 득도해 떠났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의 침상 자리 아래서 부들잎을 주워서 보았더니 그 위에 <금웅시(金雄詩)>와 <금자기(金雌記)>가 적혀 있었는데, 그 내용은 모두 당시의 일을 예언한 참언(讖言)이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