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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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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2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136쪽 | 200g | 128*210*20mm
ISBN13 9791168150409
ISBN10 116815040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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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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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과 나뭇잎이 서로 비비는 사이
바람이 일었다

바람과 바람이 비비는 사이
꽃들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꽃들을
가을이라 했다

나는 가을에서 길을 잃었다
---「가을」중에서

누가 던져 놓았나
나뭇가지에 훌라후프 하나 걸려 있다

가지를 잡은 훌라후프
가지에 잡힌 훌라후프
가지가 매달린 훌라후프

가지만큼 흔들리는 훌라후프
그러나 죽어도 가지가 되지 못하는 훌라후프
그러나 어쨌든 훌라후프인 훌라후프

훌라후프를 꿰고 있던 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훌라후프가 흔들린다
훌라후프의 둥근 원 안으로 바람이 지나가는 동안
전후좌우 기웃거리며 둥그런 것을 지키고 있는 훌라후프

둥근 것이 갈고리가 된 훌라후프!
---「걸리다」중에서

장미 넝쿨이 울타리를 넘었습니다.
꽃을 올려놓은 넝쿨이 길 쪽으로 기울어졌습니다.
길 너머의 뿌리가 넝쿨을 잡고 있습니다.
굵은 넝쿨에는 굵은 가시가 돋아 있습니다.

가시를 가린 잎을 보며
사람들이 지나갔습니다.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꽃을 보며
사람들이 지나갔습니다.

달빛은
꽃잎에도
가시에도 무너졌습니다.
자근자근 길을 밟으며 걷던
고양이 한 마리가

휙!

울타리를 넘었습니다.
넝쿨이 잠깐 어두워지고
몇 잎의 꽃잎이 꽃받침을 놓아둔 채
꽃잎 지듯 졌습니다.

꽃잎에 눌린 길이
점점이
달빛에 젖었습니다.
---「장미와 고양이」중에서

나무가 나무를 둘러싸고 있는 그늘에 서면
누구든 그늘처럼 서늘해지리
그 가늘고 굵은 가지에 촘촘히 다가선다면
누구든 먼 곳을 보지 않으리
키 작은 나무가 키 큰 나무 밑에 선다면
작은 나무는 더 이상 작아지지 않아도 되리

나무와 나무를 비집고 선 그늘에 들면
그늘은 그늘로 깊어지고
비로소 풀은 풀로 흔들리리
그때 머리 위에서는
잎과 잎 사이 하늘이 조각조각 날아가고
줄기와 줄기 사이로
바람이 회초리로 날아가는 것을 보리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리

우듬지마다 한 우주가 흔들리리

그리고
온갖 잎들이 새처럼 날아오르는 걸 보게 되리
---「고요의 그늘에 서다」중에서

명자가 달린다
다섯 걸음이 끝인 거실을 달린다
두 개의 의자, 정사각형의 작은 식탁, 두 개의 그릇이 엎어져 있는 싱크대를 지나
창문 사이로 구부러져 들어오는 햇살을 자근자근 밟으며
반쯤 채워진 물컵을 들고
명태처럼 뻣뻣한 걸레를 들고
켜 놓은 티브이 속의 사건들을 들고
달린다

그때 나는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명자의 중얼거림이 들린다

142cm의 키를 늘이며
밤과 낮이 나를 데려가고 있어
내 키는 줄어드는데 당뇨병은 왜 자꾸 자랄까
냉장고는 넘치는데 내 위장은 왜 먹는 것을 거부할까
허리는 왜 자꾸 굵어지는지
민들레 솜털 같은 은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숨이 차!!
이젠 그만 눕고 싶어
명자의 말들을 빨아들인 청소기가 문득 멈춘다

전화벨이 울린다
뭐 했냐고?
아무것도 한 거 없어
네 말만 들으라고?
내 나이 87인데 왜 네 말만 들어
네 하루와 내 하루가 같니?

거울 앞에 앉은 명자가 립스틱을 바른다
입술에 빨간 명자꽃이 피었다
명자가 빨갛게 웃는다

벽에 걸린 시계 속에서
명자의 시간이 870km로 달리고 있었다
---「명자의 일기」중에서

문 앞에 두루마리 휴지 한 묶음 놓여 있다
누가 보내온 것일까
잠시 생각이 폭탄 마주한 듯 위험하다
이리저리 굴려보고 살펴보는데
비닐 위에 고딕체로 인쇄한 메모지가 붙어 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어떤 불편?
줄 것이라는 것인지
준 것이라는 것인지
이 휴지로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보내온 곳도 돌려보낼 곳도 모르는
불편한 덩어리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옷도 벗기 전에
집이 쿵쿵 울린다
차르륵 쇠 잘리는 소리 무엇인가 던지는 소리
부서지는 소리 인부들 고함치는 소리가 우주를 토막 내듯 요란하다
몸이 허공에 둥둥 떠다닌다
속이 울렁거린다
TV 소리를 잡아먹고 전화 통화를 잡아먹고 새벽잠을 먹어버리는 소리에
머릿속이 휴지처럼 하얗다
집안으로 들어온, 이 희고 긴 폭력을 노려보다가
하릴없이 몇 칸 쭉 찢어 귀를 막는다
---「휴지처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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