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이후 한국 미술의 흐름은 급진적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가속화되었다. 압축적인 경제성장은 한국 고유의 시간을 배속하여 세계의 시간을 향하여 나아갔다. 우리는 불투명해진 당시의 미술 현장의 모습을 보다 또렷하게 식별할 수 있도록 겹쳐지고 엉킨 다종다양한 활동들을 하나씩 떼어냈다. 그리고 일 년 단위의 시간이 다른 시간, 다른 실천과 어떻게 마주치고 맞물리며 자장을 일으키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연구는 무엇보다 전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우리는 90년대를 전지적 관점의 예술가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시기로 보았다. 대중매체, 영상 미디어와 인터넷 등을 통한 소통 방식의 다원화, 탈매체적 실험과 정체성 정치학을 기반으로 한 시각예술의 다양한 실험은 전시를 기반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때부터 전시를 기획하고 생산하는 과정과 활동이 사회를 해부하여 바라보는 문화인류학적 실천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 p.9~10
90년대는 한국에서 큐레이터십 모델의 발생 시기라고 할 수도 있는데, 년대 큐레이터십 모델은 ‘평론가큐레이터’, ‘행정가큐레이터’, ‘작가큐레이터’, ‘큐레이터큐레이터’ 모델이 그것이다. ‘평론가큐레이터’ 모델은 고전적 의미의 작가와 평론가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전시를 매개로 작가와 작품에 개입하기 시작하는 평론가가 등장하고, 큐레이터로의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행정가큐레이터’ 개념은 행정적, 정책적 기획에 의한 전시 프로그램에 의해서 그 전시를 진행, 관리,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주된 역할로 하면서도 소극적 의미의 기획 역할을 병행하는 것을 일컫는다. ‘작가큐레이터’ 개념은 작가이자 기획자로서 자신의 작품을 병행하면서도 확장된 작품 혹은 활동 방식으로서 전시 기획을 수행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고, ‘큐레이터큐레이터’의 경우는 전시 자체를 지적 생산 활동의 본래적인 모델로 고려하고 이를 통해서 의미 생산 장에 전시라는 이름의 텍스트를 생산하고자 하는 행위 모델을 일컫는다.
--- p.47~48
1999년 대안공간의 등장은 2000년의 시작과 동시에 더욱 다각적으로 펼쳐진 지각 변동의 기폭점과도 같다. ‘대안’이라는 다소 모호한 용어가 등장한 이후 후속 미술 공간들은 명확한 역할 규정의 의무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고, 뒤이어 새로운 유형의 미술 공간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서울을 넘어 안양의 스톤앤워터, 부산의 대안공간 반디(2000년) 등 지역 커뮤니티에 기반을 둔 공간들이 문을 열고, 일주아트하우스(2000년)처럼 영상과 미디어 아트 등 특정 매체 전문 공간도 등장했다. 이들 공간의 운영 주체는 민간뿐만 아니라 기업(쌈지스페이스, 일주아트하우스)과 공공기관(한국문화예술진흥원 산하 인사미술공간)으로 확장됐고, 몇몇 갤러리는 젊은 작가에 초점을 맞춘 세컨드 공간(갤러리현대의 두아트 등)을 열어 변화를 꾀하는 등 1999년 이후 미술 공간 다변화의 크고 작은 여진이 이어진다.
--- p.284
‘미디어 아트’는 태생부터 용어의 모호성 때문에 많은 논란을 낳았다. 미디어를 매체로 본다면, 매체를 쓰지 않는 예술이 없으니 특정 예술 형식을 지칭한다고 하기 어려울 뿐더러, 미디어를 대중매체로 볼 때와 테크놀로지로 볼 때 그 범주와 해석이 상이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미디어 아트를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로 어느 정도 합의를 보고 있으나, 정작 그 안의 세부 장르를 보면 비디오 아트를 비롯 디지털 아트, 컴퓨터 아트, 지네틱 아트, 로보틱 아트 등등 특정 기술/매체를 기반으로 한 용어들이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사용되고 있다.
--- p.301
2000년 이후 미술 현장은 도시문화를 다루는 전시가 활발하게 만들어진다. 그간 서구의 진보적 이론을 통한 프레임으로 한국 현대미술을 관측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미술 현장 내부의 변화가 오히려 이론적 해석을 견인하는 주체가 된다. 도시의 정체성과 건축 그리고 시각적 환경은 디자인 분야에 대한 정책적 지원으로 이어진다. ≪디자인 혹은 예술≫전(2000, 아트선재센터)은 지나치게 명시적이지만 미술이 더는 순수한 영토에 머물지 않고 일상과의 상호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소개하는 최초의 기획전이다. 미술과 디자인, 미술과 건축, 도시와 미술에 관한 연구는 세계화 시대의 문턱에서 도시의 정체성을 구축해야 한다는 복합적인 요구를 마주하게 된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신세대 작가들은 미증유의 시선으로 지연된 모더니티와 이르게 이식된 탈모더니티가 혼재한 한국의 도시문화를 관측한다.
--- p.241
80년대 민중미술 권역을 통해 논의되기 시작한 미술의 공공성은 민주화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 이후 다변화되며 벽화나 공공 조형물을 넘어 일상과 삶에 주목하고 그것을 주관하는 제도, 시스템 및 작동 방식에 대한 문제, 예술을 통한 사회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진다. 이는 작품뿐 아니라 작품이 제작되는 환경, 제도, 맥락 등에 대한 것을 포함한다.
--- p.417
‘1990년대는 어떤 시기다’라고 하나로 단언하기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1990년대부터 2008년까지를 지속적으로 아우르는 미술계의 키워드를 들라면,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미술시장의 팽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1998년에 IMF를 겪으면서 미술계 및 미술시장 또한 구조조정을 겪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8년 세계 경제 위기 전까지 미술시장은 19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팽창해가면서 미술계 그리고 미술문화 전반에 굉장한 영향력을 끼쳐왔다.
--- p.519
큐레이터란 작가들의 스테이트먼트와 그 작업들을 모아 그 자신의 ‘프레임’ 안에서 새롭게 직조하여 세상에 공표함으로써 어떤 분쟁 지대를 열어가는 담론을 생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시는 어떤 기대할 수 있는 풍성함으로 일종의 ‘상정논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추법(abduction)을 마음껏 응용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는 기존의 알려진 명시적인 지식에 기대어 전시를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암묵적이고 종속적인 것, 즉 지나온 과거 그리고 현재라는 아직 채 드러나지 않은 시간(시대)의 어둠 속에서 어떤 가능성으로 모두 함께 점프하는 행위이다. 지식계에 문화연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탐구는 새로운 지식을 산출하기 위한 새로운 연구 방법으로서의 큐레이팅 사유 실험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 p.540~541
모든 좌담은 우리에게 멀지 않은 시기의 경험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좌담을 통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거나 어떤 의미를 규정 내리기보다 오히려 그 경험의 층위를 이야기함으로써 다시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한국 현대미술의 동시대성을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 기획되었다. 경험은 사적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불완전한 사료이지만, 한편 그 시간을 직접 감각하고 지각했다는 측면에서 가장 강력한 진술이자 논리가 된다. 우리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다시’ 볼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 p.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