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단순히 지금은 선물을 받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이 좌절된 슬픔을 아주 작은 어떤 무엇으로도 위로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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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는 청결하게 닦은 욕조의 젖은 향이 났다. 햇살이 비추는 넓은 현관을 향해 비스듬히 열린 창에서는 신선한 공기, 풍성한 수확을 생각나게 하는 가을 향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퉁이에는 커다란 실내 식물이 생기를 회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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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찬송가의 멜로디는 그 속에 향기와 소리들을 함께 몰고 왔다. 머툴러 복도에서 끝없이 풍기는 수공 비누 냄새, 나지막하게 들리는 문 여닫는 소리, 자기 손가락의 긴장된 움직임, 그리고 겉으로는 배워야 할 가사를 읽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언제 가까운 곳에서 장거리 전화벨 소리가 들릴까, 몸과 마음 전체가 하나의 귀가 되어 기다리고 있던 자신의 옛 얼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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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이 다가왔다. 마지막 이별의 시간.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기억할 마지막 모습이 머툴러 세계의 특징과 너무나 달라 이상했다. 소녀들이 예술품들 사이에서 실크로 입힌 의자에 앉아 멋진 과자를 먹고 있다. 땅딸막한 것, 흑백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타오르는 벽난로와 반짝거리는 은빛만이 가득할 뿐이다. 오늘 주전너는 유난히 아름다웠고, 그 알 수 없는 선동자의 머리를 원한다고 한 이후 컬마르는 더욱더 남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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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일, 너는 누구지? 쿠마에의 무녀도 영원하지 않고 매번 새로운 젊은 여사제가 영원을 딛고 지하세계의 의복과 관습을 이어받았듯, 그렇게 항상 새로운 아비가일이 있는 거야? 일상생활에서 만날 때면 내가 널 좋아하니, 아니면 두려워하니? 아, 내가 널 볼 수 있다면, 네 손을 잡을 수 있다면! 네가 한 일에 고맙다고 인사도 할 수 없다니. 너는 누구지, 아비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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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떠올릴 때면, 그 수요일과 관련된 모든 에피소드와 장면이 서로 연결되어 떠올랐다. 입을 벌린 물고기, 열린 서류 캐비닛, 콧수염이 난 유리공과 장군. 이 장면들과 사건들을 떼어놓으려, 그저 아버지에 대한 기억만 따로 남겨놓으려 수없이 시도해봤지만 실패했다. 항상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장군의 모습과 함께, 이상하게도 이란성 쌍둥이처럼 므라즈 씨의 얼굴도 떠올랐다. 날카로운 얼굴선에 덥수룩한 콧수염으로 치장한 그의 모습과 서류 캐비닛 앞의 마룻바닥과 카펫 위, 이미 움직임이 없는 반짝이는 물고기의 사체들이 함께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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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시계가 자정을 울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종이 울릴 때 소녀는 아비가일 석상을 지나 달리고 있었다. 달빛이 밝게 빛나는 봄밤이었다. 기너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잘 볼 수 있었다. 손잡이가 없는 철문에 다다랐을 때는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뭔가 신호가 오기를 기다렸다. 오랫동안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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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당신 마음을 얻을 수 있나요?” 쾨니그는 “50번!” 하고 말했다. 50번 옆의 대답을 읽는 주전너의 목소리는 거침없었다. “아무것도 없음.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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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게 철제 대문을 밀자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기너는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나서 꼼짝 못 하고 얼어붙었다. 머툴러 거리, 벽 바깥쪽, 정원 대문에 한 남자가 길을 막고 서 있었다. 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뒤돌아 뛰어가려 했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다.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실패. ‘모두 헛된 일이었다’라는 의식이 갑자기 그녀의 눈물을 멎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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