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예술 작업을 하는 이유는 모듈, 규범, 시스템 같은 문명의 합리성에 접근하기 위함이다. 재료는 단위화되고 조직화된 물질과 비물질적 요소다. 설계 도면과 분업화된 생산 시스템을 통해 여러 종류의 기계와 엔지니어링이 작품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이 요소들을 부품이라고 여긴다면 이를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을 제품(product)이라고 볼 수 있다.
---「서문」중에서
작품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면화 단계이며, 이는 예술가의 드로잉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실제로 드로잉은 도면화 단계를 거치며 상당히 합리적으로 발전되고 구성된다. 적합한 재료, 국제적 생산규격, 효율적 구조와 체결 방식 등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설계 도면은 그것에 따라 제품을 제작하는 엔지니어들과, 나아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서문」중에서
우리 문명에서 불거져 나온 욕망의 덩어리들이 아름다움의 결정체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수평정원’의 경우, 문명의 혹들이 빛을 반사하고 서로를 반영·반사해 반짝이면서 마치 하나의 샹들리에처럼 현란한 아름다운 덩어리가 되도록 하는 게 목표였다. 그것을 위해 가공된 금속이 최적의 형태를 갖추도록 설계하고 마무리했다. 또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타원구가 최대한 촘촘하게 들어가도록 설계했다. 더 많은 타원구가 서로 가까이 있을수록 더 많은 반사를 일으켜 화려함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혹은 현란하고 현혹적인 면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비판한다기보다 나 또한 그 현란함에 매혹되는 면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화 - 불안과 경이에 관한 도면들」중에서
개념미술 아티스트,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는 “이러이러한 사탕 무더기를 전시장에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쌓아놔라”라고 지시했다. 그의 사후에도 그렇게 전시되고, 그냥 그것이 작품이다. 그러니 작가의 설계도가 작품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작가의 조각은 매뉴얼에 의해 만들어지니 완성작에 꼭 작가의 손이 닿아야 되는 건 아닐 수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그가 살았을 때는 자신이 연주했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연주한다. 그런 방식은 시공간적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당신의 작품이 개념적이라고 생각한다. 물성이 매우 강하면서도 한편으로 개념적이다. 나중에 이를 유언으로 남겨도 될 것 같다. ‘내 작품은 음악 같은 미술이다. 작곡가가 사후에 남긴 악보로 누구나 그의 곡을 연주할 수 있듯이 내가 남긴 설계도로 누구나 내 조각을 만들도록 허가한다.’ 그러면 FM 클래식 방송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누구누구 연주” 이렇게 나오는 것처럼, 먼 훗날 “김병호의 ‘정원’, 누구누구 제작” 이렇게 나올 수도 있겠다.
---「문소영, 대화 - 불안과 경이에 관한 도면들」중에서
김병호 작가가 사운드와 오브제가 결합된 작품의 제목을 ‘A Colloidal Body’라고 붙인 것은 서로 녹을 수 없는 두 가지 이상의 성분이 거시적으로 혼합된 상태에 있는 것을 콜로이드라고 총칭하는 것과 상통한다. 작품의 창작은 자유의지이며 작품의 감상 또한 자유의지일진대 그에 비추어 봤을 때 김병호의 작품 제작 방식은 남다르다. 마치 제품의 설명서인 듯 제작 과정을 정밀하고도 예술적으로 그려낸 설계 도면 드로잉은 그가 가진 작업관의 명료한 선언문과도 같다.
---「박윤정, 1. 질서의 공포 - 교질 장치」중에서
가지런한 선들의 퍼레이드는 희망찬 행진이다. 직선과 곡선은 치밀한 설계로 연결된다. 직선은 빈틈없이 빽빽하고 평행을 유지한 채 배열되고 곡선은 각기 다른 곡률로 이어져 있다. 설계가 까다롭지만 매우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질서정연한 선들의 군집과 이 선의 끝에서 자연스럽게 벌어진 나팔 모양은 시스템 속 은밀한 관계들에 의해 의도된 연주다. 마치 용맹스러운 군악대의 악기처럼 말이다.
---「1. 질서의 공포 - 조용한 증식」중에서
이 작품을 구성하는 출발점은 이성과 합리의 가치이다. 그리고 단위화되고 조직화된 요소들을 재료로 사용했다. 재료들은 드로잉(설계도면)에 근거한 대량생산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 같은 합리적인 생산 방식은 기능과 규격에 의해 체계화된 산업화 시대의 조형성을 담고 있다. 이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규범과 체계들로 조직화된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체계적으로 규격화된다. 필연의 공포 또한 설계부터 완성까지 산업 규격 체계를 따르며 정교하게 가공된 부품들로 조립되었다. 분업화되고 획일화되는 물질세계를 대변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구조가 작품에 기능적으로 개입하게 했다.
---「1. 질서의 공포 - 조용한 흐름」중에서
정밀기계를 통해 가공된 금속들의 화려한 광택은 사람들을 거리낌없이 유혹한다. 김병호 작가는 기하학적 모듈, 금욕적일 정도로까지 느껴지는 체계적인 질서, 금속의 광택(reflection) 등을 존재와 환경에 대한 의심을 유도하기 위한 모종의 장치로 쓴다. 그는 그의 작품이 더 반짝이고 화려할수록, 사람들이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작품은 각종 시각적 유혹에 노출된 동시대인의 환경을 극대화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시각적인 믿음과 그 배후에 깔려있는 의심의 알레고리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신가현, 2. 계획된 자연 - 수평 정원」중에서
나의 작품에서 타원구가 처음으로 그려진 이유에 대해서는 솔직히 할 말이 있다. 이것은 비정상적으로 불거져 나온 살덩어리인 혹의 형상이다. 화려한 문명에 부응하는 듯한 욕망의 덩어리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무척 아름답다고 느낀다. 제거할 수도 있지만 아름답기 때문에 제거하고 싶지 않다.
---「2. 계획된 자연 - 수직 정원」중에서
토템은 씨족의 상징물로, 토템에는 씨족 운영에 필요한 금기와 금기의 배후인 욕망이 공존한다. 불안하지만 매혹적이고, 위협적이지만 경이로운 김병호의 작품 역시 물신숭배의 욕망과 금기에서 배태된 포스트모던 토템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작품을 불안과 경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데, 여기서 불안은 억압된 것의 복귀에서 파생되며, 경이는 질서의 파열로부터 생성된다. 이로써 김병호의 조각은 억압된 욕망의 복귀인 동시에 안정과 질서의 위협으로 불안과 경이를 시각화하는 우리 시대의 토템이라 할 수 있다.
---「이상윤, 비평 - 기계 토템의 검은 미학」중에서
인류는 어떤 물건이든 평면으로 만들어 왔다.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금속과 목재 등을 재료로 한 많은 제품이 규격화되어 만들어졌다. 공장에서 출고된 물건들은 삶의 공간을 연출하는 재료로 우리 주변을 뒤덮고 있다. 이것은 주변에 늘 있기 때문에 너무나 익숙하다. 마치 공기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당연한 우리 환경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의 삶을 구성하는 물적 환경을 답습하기 위해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평면 생산품만을 사용하여 마치 종이접기를 하듯이 자르고 접고 붙이는 방법만 사용했다. 나의 이런 태도는 비판적인 것이 아니다. 나도 이런 환경에 적응해 살고 있기 때문에 불평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다만, 오래전부터 나에게 제공되어 왔고 미래의 기억에도 남아 있을 현재의 환경에 대한 의심을 하기 위함이다.
---「3. 평면의 두께 - 기억을 위한 기념일」중에서
한 개의 개체가 혼자 직립할 수 없지만, 상하좌우 앞뒤로 연결된 개체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하나의 시스템으로 수렴된다. 그래서 이것을 모듈(module)이라 부른다. 많은 모듈을 정교하게 쌓으려면 합리적인 배열과 기능적 디자인이 필요하다. 긴밀하게 배열하고 쌓아야 서로의 무게를 지탱하는 견고한 완성체가 된다. 서로에게 관계 맺는 모듈 단위를 구축적으로 배열해 만든 이 우상의 무리는 또 하나의 기념비가 된다.
---「5. 기억을 유혹하다 - 매개 기억 | 3SBCP」중에서
김병호는 문명의 본질을 집요하게 탐구해 왔다. 그리고 이 탐구는 문명에 대한 다면적 진술들을 낳는다. 문명은 공포스럽다, 문명은 의심스럽다, 문명은 매혹적이다. 문명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진다 등등. 그런데 이제 이 모든 진술들 아래서 그것들을 떠받치고 있는 단 하나의 진술은 ‘문명은 우리 자신의 창조물이다’인 것으로 보인다. 김병호가 우리를 둘러싼 아름다움이 문명의 현혹임을 투시하고 그것을 의심할 것을 권하면서도 결코 그 아름다움을 단순히 제거해버리는 방식으로 사고하지 않는 것은 그것의 창조자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에 대한 숙고를 놓지 않기 때문이다.
---「윤영광, 비평 - 힘, 살, 꽃 - 김병호의 바깥에 대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