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후! 너, 엄청 빠르네? 육상 선수야 ? 향기가 벌써 멀리 퍼진 건가 ? 그럼 나도 멀쩡할 리가 없는데?”
낮게 울리는 음성이다. 누구? 고개를 들어 보니 낯설고 커다란 남자가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송아지 같이 선하고 선명한 눈으로. 그러나 웃음기는 없다. 짙고 긴 눈썹을 갈색 머리칼로 살짝 가린, 눈매도 입매도 시원시원한 김은산은 일단 큰 키로 상대를 압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 코, 입, 완벽하게 균형 잡힌 조각 같은 얼굴이 한눈에 봐도, 100미터 앞에서 봐도, 수백 명이 봐도, 미남이다. 깊고 짙은 갈색 눈동자, 그리고 굳게 다물면 더없이 진중한 입매 때문일까. 오늘이보다 네댓 살은 많아 보였지만 실은 오늘이와 동갑인 스물세 살이다. 아주 살짝 입 꼬리만 올려도 진중함 따위 솜사탕처럼 녹아 버리고 장난기로 가득 차는 묘한 남자.
갑작스런 은산의 등장에 오늘이는 어리둥절 눈만 껌뻑거렸다. 그에 은산이 씩,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 안에서만 햇살이 빛나는 것 같았다.
“반한 거야 ? 안 돼, 이 몸은 인간이 반해서는 안 될 귀한 몸이거든.”
뭐래는 거야 ? 어처구니가 없어진 그녀는 은산에게서 팍, 떨어져 나와 두 주먹을 쥐고 반박했다.
“뭐야 ? 멋대로 나타나서, 헛소리나 지껄이고!”
한 발을 탁, 구르며 맞서는 그녀를 은산이 보았다. 땀투성이인 볼록한 이마, 꽉 깨문 발그레한 입술. 희한하게 맑고 또랑또랑한 눈빛이다. 아기들이나 그렇게 빛날 눈동자, 별빛을 박아 넣은 것처럼 빛나는 눈동자다. 게다가 꽤 귀염상이다. 하지만…….
오늘이도 정신을 차리고 은산을 노려보았다. 크다! 만약 계속 바라봐야 한다면 목이 아플 정도로 올려 봐야 할 큰 키다. 그리고 잘생겼다. 부인할 수 없이 잘생긴 외모에 그녀는 절로 으흠, 헛기침을 내 버렸다. 그래, 인정. 엄청 잘생겼네. 아니,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갑자기 튀어나와서 자신을 방해한 것도 이상한데 이제 보니 여기저기 찢어진 청바지 위, 작고 검은 복주머니 같은 걸 허리에 두르고 있는 것이 더더욱 이상하다. 정체가 뭐지?
--- pp.10~11
“오늘이 이겨라!”
“할락궁이 아찌 이겨라!”
청색과 백색의 깃발을 흔들며 언덕 꼭대기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이 아까부터 응원 열전을 벌이고 있다. 할락궁이가 보살피는 저승꽃밭의 아이들이다. 이승에서 열다섯 살이 되기 전에 죽음을 맞이한, 그것도 부모와 떨어진 어린 혼들이다. 오늘이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들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그 순간을 할락궁이는 놓치지 않는다. 저승꽃밭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커다란 꽃을 순식간에 꺾어 칼처럼 오늘이의 목을 슥, 그었다.
“실전이었다면 너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놀란 오늘이가 와다닥, 물러서며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할락궁이는 가차 없이 돌아서 버렸다.
“할락궁이 아찌가 이겼다!”
어떤 깃발을 들었든 상관없이 아이들은 저들끼리 끌어안고 깔깔거린다. 웃고 있는 아이들 곁엔 그들을 보살피는 꽃밭의 선녀들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다정하고, 아름답고, 또한 뭉클한 풍경이었다.
--- pp.17~18
화원 ‘궁이’는 경강시의 한갓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계절이 봄의 온도와 바람으로 멈춰 흐르는 곳. 넓고 아늑하며, 상쾌하고 녹음이 짙은 곳. 성기게 심긴 식물들 사이로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살랑거렸다. 그리고 군데군데 사람들에게 요괴라고 불리는 식물들도 그곳에서 자라고 있다. 매일 그녀의 보살핌, 혹은 감시를 받는 요괴들이 요기조기서 작은 눈을 깜빡거렸다. 오늘이는 그만 혓바닥을 쏘옥, 내민다. 그에 화답하듯이 요괴들의 킥킥, 히힛,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분은 네가 생각하는 부적쟁이나 요괴가 아니다. 주머니의 무늬로 봐서 비형 일가임에 틀림없어.”
“비형 일가 ? 이름이 비형이에요?”
딱콩! 오늘이의 질문에 다시 꿀밤이 주어졌다.
“아! 또 왜요? 이마에 빵꾸 나겠네!”
볼록한 이마를 문지르며 그녀가 투덜대자 할락궁이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책도 좋아하는 녀석이 그리 말을 못 알아들어 어쩌누? 그분이 비형 일가라 했지, 언제 비형이라 했느냐 ?”
“뭐, 그렇다 치고, 그게 뭔데요? 비형 일가 ?”
어느새 손에 기다란 지팡이를 짚고 거울 안을 들여다보던 할락궁이가 오늘이를 힐끔 쳐다봤다.
“네게 말해 준 적이 없었던가 ?”
“없거든요, 절대로.”
오늘이가 툴툴거린다.
“그랬나 ? 하긴 인간인 네가 알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무튼, 비형 일가는 모든 요괴들의 우두머리이자 신들의 수호자다.”
할락궁이의 말에 머릿속 은산의 이미지가 블랙홀 안으로 꺼져버린 것 같은 느낌에 오늘이가 화다다, 머리를 내젓는다.
“그렇게나 대단한 인간이 왜 그깟 씨앗 요괴나 쫓아다녀요?”
“인간이 아니래도. 그들의 조상이 도깨비 왕이니 반만 인간이라 해야겠지. 거꾸로 생각하자면, 반은 강력한 도깨비라 능력도 출중하고……. 그들에게 걸린 저주는 너무 긴 이야기이니……. 여하튼 그들은 예부터 요괴들과 신들을 수호하며 질서를 지켜 왔어. 즉 인간 세상과의 균형을 잡게 해 주었단 것이야. 그런데 씨앗 요괴는?”
--- pp.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