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1부: 토끼는 빠르니까 두 귀를 세운 채
경주하는 슬픔 엎질러버린 문장 겨울 경제 역사란 무엇인가 오늘을 극복하셨군요 손으로 누르고 있던 것들 마르는 시간 책 여기서 뭐 하세요… 라는 물음에 부딪쳤다 산양/사냥 자기의 얼굴을 자기의 팬티로 생각하는 사내의 이야기 편집실 은목서 나는 나비를 만들 순 없다 팔월의 배롱나무 2부: 흰 것은 추위 속에 있고 합정동 힘든 밤인가 사실 9쪽 13쪽 14쪽 야구공 잠 기후 행동 해변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겨울 공장 비와 요리 동창회 힘든 밤인가 3부: 문장들은 접혀 있었다 4월식 문장 목련 그늘 무화과 비명을 지르지 않는 양들처럼 소고 희망을 가져본다 방랑자들 날아가는 모든 것 안개의 각도 실시간 낚시 다마스쿠스 그 여자 이명 4부: 어떻게든… 이란 말에 인간과 숲 카페 한 시절 벗어놓은 바지 어떤 장소들 이석 들 부엌 우연 32평 재난 중정이 있는 낡은 상가 두부 5부: 진짜 오리를 타겠다고 얼굴 비 상자 외출 사랑 서울 조용한 흔적들 시를 쓰는 인간 비슷한 것이 되어 견디는 불 물 아티스트 |
성윤석의 다른 상품
겨울이 오면
그곳 허름한 아파트 아이들은 봄과 여름에 그러했던 것처럼 고층 아파트를 질러가지 못하고 돌아 학교에 간다 눈이 내리고 바닥은 얼 것이다 나는 직장을 버리고 글을 쓰며 살고 있다 이 일은 유효한가 ---「겨울 경제」중에서 꿈을 꾸었는데 사람 하나가 모자란다고 방관자인 나보고 끼어들라는 거야 글쎄, 아무 관계도 없는 나보고 나는 나도 모르게 줄을 섰는데 헉헉거리며 달려온 누군가가 무언가를 자꾸 건네주었고 나는 달렸지 이어 달렸지 이어 너를 당신을 허수아비만 선 들판을 ---「역사란 무엇인가」중에서 사진을 잘 찍지 않는다 나는 늘 밖에서 밖으로 나갔다 얼굴이 사진에 박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어릴 때 군대 시절의 사진도 없다 한때 군인이었다는 거 회사원이었다는 거 사장이었다는 거 사진이 몇 장 없다 동료 작가들과도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 나는 늘 밖에서 밖으로 나갔다 ---「자기 얼굴을 자기의 팬티로 생각하는 사내의 이야기」중에서 쓰는 자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쓰는 자들은 나서고 도착하는 자입니다 도착하자마자 나서는 자들입니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나의 말을 낚아채가는 자들입니다 나 또한 그런 부류입니다 ---「합정동」중에서 이웃들이, 오래전 이웃들이 묻혀 있을 길을 건너간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고학자도 도굴꾼도 발굴하지 않을 길들의 지하에서 아무래도 나는 언젠가 그 언젠가 가슴에 폭탄을 두르고 어두웠으나, 환해지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 스위치를 누른 적이 있는 것만 같다 ---「기후 행동」중에서 그는 병이 들었다고 했다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한다고 했다 갈 필요가 없는 사막 머물 필요가 없는 초원 새벽의 눈길 만이 남았다고 했다 그곳들에서 산다 했다 열심히 기도했으나 막상 죽고 나면 갈 곳이 없을 거라고도 했다 그는 병이 들었다고 했다 자신의 병엔 자신의 뜻도 있다고도 했다 ---「방랑자들」중에서 |
뜻밖이라는 밖에서 마주하는
인생의 몇 가지 사실들 가장 견고한 건 견고한 일상이다 시간에 맞춰 일하고 밥 먹고 싸는 것 아무도 깨뜨릴 수 없다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게 내 실수다 화단에서 말을 엎질렀더니, 이렇게 되어버렸다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 ―「엎질러버린 문장」 부분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엎질러버린 문장」이라는 시에서 그는 말한다. “가장 견고한 것은 견고한 일상”이라고. 일상의 견고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것. 시간에 맞춰 일하고 밥 먹고 싸는 것. 인간이 일상을 영위함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동시에 충분한 행위. 그러한 가장 단순한 행위의 반복이 일상의 견고함을 만든다. 그러나 시인은 이 단순한 견고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깨트리는 “실수"를 범하고야 만다. “화단에서 말을 엎질렀더니, 이렇게/되어버렸다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 이렇게 되어버렸다니, 어떻게 되어버렸다는 말인가? 쓰는 자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깨진 몇 개의 접시를 깨지기 전으로 되돌리지 못하는 것처럼, 쓰는 자가 되어버리는 일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시인에게 있어 “내가 잘 살지 못하는 이유”다. 쓰는 일은 필요를 위한 행위일까? 시인은 “나는 직장을 버리고/글을 쓰며 살고 있다/이 일은 유효한가”(「겨울 경제」)라며 유효성을 묻는다. 그러나 시인은 답을 내리거나 듣기 위해 자문한 것 같지는 않다. 일의 유효성과 관계없이 시인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간수가 오기 전에 계속해서 캄캄한 독방 바닥을 파듯이 글을 쓴다. “뜻밖”이라는 바깥을 만나기 위해서다. 그러나 뜻밖이라는 바깥을 만나기 위함이 과연 목적이 될 수 있을까. “얼굴의 재료는 얼굴”이고 “시의 재료가 시”(「얼굴」)이듯이 나아간 바깥에는 또한 바깥의 바깥이 있기에, 그러한 행위는 목적 달성을 위함이기보다는 목적 없음, 혹은 목적 상실의 지속에 더 가깝다. 성윤석의 새 시집은 그처럼 견고한 일상 바깥으로 나가 끝없이 바깥을 사유하는 방랑자들의 이야기이다. 시인은 목적 없는 상태로서의 쓰기를 지속하며 문밖에 도착해 있는 장면들(「한 시절」)을 만나고 통과한다. 일상에 실패하면서까지. 이러한 쓰기를 통한 일상 바깥으로의 전전을 통해 ‘나’에게는 삶의 바깥에서 흘러가는 또 하나의 삶이 만들어진다. 동시에 “나를, 뒤적여봅니다 쓰는 자가 되어 한 바퀴 돌아봅니다”(「합정동」)라고 그가 말하듯이, 그러한 쓰기를 통해 우리의 인생 역시 뒤적거릴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된다. 쓰는 자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쓰는 자들은 나서고 도착하는 자입니다 도착하자마자 나서는 자들입니다 ―「합정동」 부분 성윤석은 “나는 늘 밖에서 밖으로 나갔다”(「자기의 얼굴을 팬티로 생각하는 사내의 이야기」)라고 쓴다. 그런데 바깥의 바깥은 간혹 어딘가의 중심이기도 해서 ‘아무 관계도 없는 방관자’(「역사란 무엇인가」)는 꿈꾸듯이 누군가가 건네준 무엇을 들고 달려가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은 시인의 필연적 소명에 속한 일이라기보다는 우연적 운명에 의해 맞닥뜨리는 사건에 가깝다. 그러한 사건을 겪어나가며, 시는 사물의 심부를 밝히는 특별한 거울처럼 우리의 일상을 비춘다. 끊임없이 재난문자가 도착하는 우리의 자본주의 도시와 그곳의 사물들을. 성윤석 시인의 개인적 내력과도 같이 여러 직업을 떠돌고 있는 서민적 화자들의 삶을. 그 목소리는 현장에서 울리듯 생생하기에 그러한 삶들을 기록하는 데 사진은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망설임 없이, 혹여 망설임이 있더라도 일단은 멈추지 않고 움직이려는 듯한 성윤석 시인의 시구와 행간에서는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만질 수 있는 육체처럼 다가오는 언어를 통해 쓰기의 지속이 맞닥뜨리는 뜻밖의 기쁨과 슬픔 들을 나누게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