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필드 주택 단지의 집들은 서로 너무 닮은 나머지 다 같이 흐릿해지고 있었고, 나는 그 점이 마음이 들었다. 아름다운 흐릿함은 내가 사는 동네의 우울한 단조로움보다 나았다. 하지만 이 집, 막다른 골목 끝에 홀로 존재하는 이 집의 무언가가 매번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집을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인도에서 내려와 도로 중앙에 섰다. 늘 너무 조용한 곳이라 도로에 서 있는 게 위험한 행동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차 소리가 들린 뒤에야 차가 눈에 들어왔고, 그때까지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훗날, 나는 이 순간을 되돌아보면서 어쩌면 내가 앞으로 닥칠 일을 알고 있던 게 아닐까 궁금해하곤 했다.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나를 이 한 지점으로, 한 주택으로 이끈 것은 아닌지. 그에게로 이끈 것은 아닌지.
--- pp.16~17
“끔찍한 일이잖아요.” 내가 한 번 더 안타까움을 표해보자 에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내 팔꿈치를 감싸 쥐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팔꿈치의 뾰족한 끝을 따라 원을 그렸다. 나는 그의 손이 닿은 지점과 내 살갗을 만지는 그의 손을 번갈아 내려다봤다.
“끔찍했죠.” 에디가 내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하지만 유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잖아요. 베가 여기 없어서 당신이 여기,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거니까.”
반박하고 싶었다. 나를 그런 식으로 평가하다니, 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내가 여기 있다는 게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하지만 에디의 말이 맞았다. 나는 베 로체스터가 그날 밤 블랜치 잉그러햄과 보트를 타서 좋았다. 에디가 혼자가 되어서 좋았다. 에디는 이제 자유다.
--- pp.53~54
에디는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이 주차장에, 이런 형편없는 삶에 들어온 에디가 어색해 보였다. 현기증이 일면서 머리가 팽 돌았다.
“나도 알아. 미친 짓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에디가 말했다.
이어 에디는 멋쩍다는 듯 웃었다. 그는 밝은 햇살 아래 선글라스를 쓰지 않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런데 당신이 나를 미치게 하잖아. 어쩌겠어?”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는데도 한기가 들었다. 에디는 분명 낭만적인 사람이다. 열정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이건…… 에디답지 않았다. 그를 안 지 얼마 안 됐잖아. 어쩌면 그를 잘 모르는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곱씹었다. 이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단 하나였다. 나는 눈을 굴리며 에디를 따라 웃었다. “너무 유치하잖아.” 이렇게 말하면서도 기쁜 표정을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힘껏 당겨가며 진심인 듯 크게 웃었다.
--- p.113
머릿속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을 캠벨이 정리했다. “제인, 에디가 왜 제인과 바로 결혼하지 않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그러게 말이야. 같이 살 거라면 최소한 반지는 끼워줘야지.” 에밀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잔에 와인을 더 따랐다.
“케일럽도 결혼하기 전에 같이 살자고 했어요.” 애나그레이스가 고개를 흔들자 하나로 묶어 늘어뜨린 머리끝이 그녀의 등을 스쳤다. “그래서 내가 ‘내 생각은 달라!’라고 말했죠. 결국 결혼할 거라면 아내로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모두가 동의한다는 뜻으로 흠, 하고 소리를 냈다. 나는 큰 고민 없이 목요일 오후를 골라잡고 와인을 즐기는 부인들을 둘러봤다. 모두가 ‘결혼’이야말로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성취라는 결론을 내린 듯했다. 이제야 알겠다. 나는 위원회에 합류할 수도, 이곳에 어울리는 옷을 입을 수도, 빌어먹을 미식축구에 관해 배울 수도, 대화에 참여할 수도 있지만 그중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디에게 청혼을 받기 전까지는 결코 이곳 여자들처럼 될 수 없었다.
--- p.141
블랜치는 에디와 가깝게 서 있었는데, 베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웠으며 블랜치의 얼굴은 오렌지색 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블랜치는 에디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고 에디도 따라 웃었다. 하와이에서 베에게 지어 보였던, 눈꼬리에 주름이 세 줄 잡히는 진한 미소였다. 베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 아무에게나 지어주는 미소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더욱더 따뜻했던 그 미소였다.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블랜치의 것이기도 했다. 베는 두 사람을 등지고 돌아서서 아스팔트 위를 또각또각 걸으며 감각이 마비된 기분을 느꼈다. 결국 블랜치가 원한 게 이거였다. 블랜치가 말한 “집수리”라는 게 이거였다. 블랜치는 베의 집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원하는 건 베의 남편이었다.
--- p.183
에디는 디저트를 앞에 두고 멋쩍게 웃으며 살짝 위축된 듯이 한 손으로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정말 심하게 아름다우세요.”
그러고는 고개를 내저으며 덧붙였다. “제가 많이 취했나 봐요.”
에디는 취하지 않았다. 올드패션드를 한 잔 마셨을 뿐, 와인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 어쩌면 이 대목에서 베가 경계심을 품어야 했을 수도 있다. 에디가 방금 만난 여자에게 저런 말을 하려고 술에 취한 척을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베는 경계가 아닌 흥미가 돋았다. 베의 눈에는 모든 것을 갖춘 남자가 자신의 약한 면을 넌지시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잘생긴 데다, 똑똑하고, 성공한…… 남자가.
--- p.194
“왜 나를 찾는지도 말했어?” 겨우 들릴 듯한 목소리에 에디가 고개를 들어 다시 나를 봤다. 눈길이 매서웠다.
“안 물어봤어. 그냥 꺼지라고 했지. 당신도 그 자식의 전화를 받자마자 그렇게 해야 했어.”
에디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너무 가까워서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수건을 완전히 두르지도 못하고 몸 앞에 움켜쥔 채 같은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추운 것 이상으로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협박을 당할 때는 그렇게 하는 거야, 제인. 누가 당신을 엿 먹이려 들 때 굴복하면 안 돼. 상대가 원하는 것을 내주면 안 돼. 주도권은 나한테 있다는 걸, 규칙을 정하는 건 나라는 걸 주지시켜야 해.” 그러더니 에디는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잡았다. 그를 만난 후 처음으로 그의 손길에 몸이 굳어버렸다. 에디도 뻣뻣이 굳어버린 나를 느꼈는지 입꼬리를 일그러뜨렸지만, 놓아주지는 않았다.
--- p.237
“무슨 일 있어?”
“별일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천장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냥 집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서.”
“어떤 소린데?” 에디의 물음에 문득 내가 집에 혼자 남겨져서 웬 소음에 겁먹은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그냥 쿵 하는 소리.” 나는 에디가 눈앞에 없는데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여러 번 쿵쿵거렸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지금 고딕 소설이나 B급 공포 영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위층을 기웃거리고 있어.”
에디가 웃음을 터뜨리거나 농담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제인, 집이 크잖아. 온갖 소리가 나게 마련이야. 특히 여름에는.”
“그렇지.” 내가 말했다. “말했잖아. 이상하게 들릴 거라고.”
“한숨 더 주무시는 게 어때요, 낸시 드류 씨?” 나를 달래려는 그의 말에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화가 나고 열이 올랐다.
--- p.270
칵테일파티에 들고 갔던 작은 클러치백을 세면대에 던지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작은 가방 안에는 휴대폰과 립스틱, 민트 사탕만 (그리고 랜드리의 팔찌도) 들어 있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아주 잠시 누군가가 팔찌를 훔치는 내 모습을 봤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메시지의 발신인을 확인한 순간 속이 요동쳤다.
─ 우리, 얘기 좀 합시다.
트립이었다.
화면에 또 다른 문자메시지가 뜨자 세면대에 기댄 내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 나보고 꺼지라고 말해도 이해하겠지만, 나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왠지 당신이라면 내 말을 믿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숨을 세 번 크게 쉬었다. 그리고 네 번째 숨을 내뱉을 때, 마지막 문자메시지가 왔다.
─ 왜냐하면 당신도 위험하니까요.
--- p.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