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행
울다가 잠에서 깨어났어. 슬픈 꿈을 꾼 것이 분명한데 무슨 내용이었던지 도통 기억이 안 나… 너무 안쓰럽고 가슴이 아팠어.
나 자신이 자꾸만 작아지는 것 같다. 그리고 다시 그런 나 자신에 적응한다. 이 세상에, 분명 내가 할 일이, 또는 하고 싶은 일이 있을 텐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울 엄마, 울 엄마가 점점 기억에서 사라진다….
술 마시고 잠든, 남자의 펼쳐진 노트에 적혀 있던 글이었어. 반찬 빛깔이 유난히 고와서 배가 터지도록 저녁을 먹었어. 평소에 좋아하던 나물 비빔밥에 소고기뭇국으로. 25년 전 작고하신 시어머니 제사상 음식들이었나 봐. 조상들은 누군가 맛있게 먹어주기를 원한다고 했던 남자의 말이 생각나, 여자가 귀신의 음식을 뺏어 먹은 건가…. 맞아, 향내가 났어. 재작년 남자의 큰형이 돌아가자 제사는 남자 차례가 되었고, 직장 다니느라 피곤한 여자가 신경 쓰일까 봐 여자 몰래 남자 혼자서 차린 제사상이었어.
남자는 여자가 출근하고 없을 때 ‘혼밥’에 ‘혼술’을 했고, 퇴근한 여자는 아무 생각 없이 맛있게 먹었어. 여자는 배불러 죽겠다며 혼자서도 잘 노는 강아지를 안고서는 하릴없이 방안을 왔다 갔다 했었지. 늦은 오후 시간대에 마신 커피 때문인지, 소화 기능이 약한 사람이 과식한 탓인지, 아니면 남자의 메모를 훔쳐본 탓인지, 여자는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새벽 네 시가 넘어서 겨우 잠들었고 꿈에서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 번쩍 눈을 뜨자 슬픈 기억이 도깨비처럼 사라졌어. 남자는 우리 여보 오늘 아침은 뭐 먹을래, 하며 반갑게 아침 인사를 하고, 강아지도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총알같이 달려와 다리에 휘감겼어. 남자는 부스스한 몰골의 여자를 안아줬고, 여자는 “응, 아직도 배가 불러서…”하면서 아침을 거부했어.
“새벽 무렵에 기침을 많이 하던데, 감기가 아직도 안 나았나 봐? 오늘 병원에 가 봐, 당신.”
샤워를 끝난 여자의 이 한 마디, 고작 이 한 마디가 여자가 해줄 수 있는 전부의 배려라고 생각한 여자도 분명 슬펐을 거야. 가시 박힌 배려였을 지도 몰라. 회식이 끝난 지난 토요일 목이 아프고 신열이 나서 앓아누웠을 때, 여자는 남자가 정성껏 끓였다는 뜨끈한 소고기 시래깃국을 먹었고, 여자가 병원에 가기 싫다고 고집을 부리자 남자는 혼자서 약국에 다녀왔었지. 여자는 남자가 지어온 네 종류의 약 중에서 항생제와 소화제 두 알만 골라 먹고 나았는데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는 남자는 아직도 안 나았단 말이지.
낙엽
등으로 따스한 볕이 쏟아지는 어느 가을날, 꼬부랑 할머니 두 분이 노구를 의지할 유모차를 밀고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걷고 있어. 햇살이라도 지고 가려는 듯 집요하게 굽은 그들의 마른 등을 타고 적요(寂寥)의 시간이 미끄러져 내리는데 서글퍼지더라. 어르신의 등은 언제나 서러운 것 같아.
“어디 감수꽈?”
“병원.”
“나도 병원.”
‘병원’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꽂혔어. 꼬부랑 할머니가 되면 병원에 다니는 것이 하루의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되는 것 같아.
구름이 걷히면서 바람결에 살짝 온기가 서렸어. 도로변에 떨어진, 고운 빛깔과 도르르 말려 올라갈 듯 동(動 )적인 곡선을 그린 낙엽이 시선을 끌었어. 책갈피에 끼워 넣고 싶어서 몇 잎을 주웠어. 벌레가 살다 간 흔적인지 동그랗게 구멍이 뚫린 것도, 변두리 톱니 하나 부러지지 않은 온전한 것도 있었어. 비상을 꿈꾸듯 휘어진 잎사귀에서 숨결이 느껴졌어. 나는 알아. 그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살아있다고 바스락 소리를 내는 그 아픔이 찡하게 손끝에 묻어났으니까.
순간순간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고 돌다가 사라지는 생명들. 나뭇잎도 인간도 예외가 아니잖아? 벌레 먹은 낙엽도, 아직 온전한 모양으로 나무에 붙어 있는 잎들도 때가 되면 떨어지는 자연의 명령 앞에서 나는 느껴, 인간은 영장으로 군림하지만, 한없이 취약한 존재라는 걸 말이야. 모든 생명은 정해진 ‘수(數)’가 있어. 과학자들은 인간의 수명이 125살은 넘기기 힘들다고 해. 몸에 칼자국 한번 내지 않고 살아온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인간의 유전자는 END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대. 그런데 세상이 SF영화처럼 발전하더니 요즘은 인간의 유전자도 수정할 수 있게 되었대.
슬픔에 대해 생각해 봤어. 인간의 슬픔은 생명의 유한성에서 잉태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하지만 바로 이 생명의 유한성이 문학과 예술, 종교와 철학 등 창조적 근원이 되는 게 아닐까 싶어. 이 유한성은 빌려온 몸을 아껴 쓰고, 영혼을 선하고 아름답게 관리하라는 조물주의 뜻이었을 거야. 그리고 때가 되면 가는 것이 지구를 위해 인간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닐까. 언제쯤이면 내 아이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떼나, 초등학생이 되나, 중학생이 되나 하면서 자신의 나이를 잊고 살다가 어느 낙엽 지는 날, 문득 남은 내 생애는 얼마일까 거꾸로 셈을 세고 있구나. 사십 년, 삼십 년? 에이, 그럼에도 우리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고 있잖아.
---「어떤 슬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