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했는데, 사무실 월세나 낼 정도로 벌었던 돈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고객들은 마치 나이 든 대서인代書人이나, 타이프 치는 사람, 사전 필사자들에게 그러듯 장당 얼마씩을 시세대로 지불하곤 했다. 그리고 작품을 건네주면, 지폐가 몇 장이나 들었는지 보일 듯 말 듯한 반쯤 열린 봉투 속에 수수료를 남긴 채 허겁지겁 휙 떠나버렸다. 전공 논문이나 학위 논문들, 의대 시험지, 변호사들의 탄원서, 연애 편지, 이별 편지, 간절한 편지, 협박성 편지, 자살 위협 편지 등등, 삭제하기 전에 내가 아우바루에게 보여주었던 일거리들은 글쓰기 문체를 연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면서, 늘 이렇게 말했다. 천재야, 천재. --- p.20
부다페스트? 부다페스트에서 할 게 뭐 있다고? 나로서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다뉴브 강 보러? 술 마시러? 시 낭송 들으러? 반다는 영어를 더 연습하고, 뮤지컬을 보고 싶어 했다. 게다가 쌍둥이 자매 바네사가 런던에 살고 있었으니 함께 소호 거리를 돌아다닐 수도 있을 테고, 테니스도 같이 칠 수 있겠지. 하지만 부다페스트에는 아는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다. 거기 백화점은 있어? 몰라. 제과점이나 훌륭한 박물관은 있을걸. 부다페스트? 생각도 마! 그녀는 여행사를 찾아가서 마치 몸에 안 맞는 옷을 바꾸듯 표를 환불받았다. 난 상처를 받았다. --- pp.57-58
이렇게 부다페스트에서 한 달가량을 보내자, 헝가리어 단어의 운율이 꽤 익숙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항상 첫 음절에 강세가 있는, 굳이 말하자면, 마치 앞뒤를 바꿔놓은 불어처럼 들렸다고나 할까. 사실, 부다페스트에서의 한 달이란 크리슈카와의 한 달을 의미한다. 나는 그녀 없이는 혼자서 시내를 다니는 모험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내의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혹시라도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이 언어의 끈을 잃어버릴까 두려웠다. --- p.87
페치케 갑을 구기고 나자 이내 후회가 밀려왔다. 어쨌든 내가 부다페스트에서 가방에 챙겨 온 거라곤 이 페치케 담배 한 갑, 그리고 fecske, 이렇게 쓰인 헝가리 단어 하나뿐이었으니 말이다. 담배는 사라졌다 쳐도, 헝가리 단어를 그냥 이렇게 버릴 수는 없었다. 난 담뱃갑을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다시 펴서, 반다의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높은 선반에 꽂힌 프랑스 시집들 사이에 찔러넣어야겠다 생각했다. 이렇게 해두고 처음엔 매일 밤, 이어 하루 걸러 하루, 그다음엔 드문드문 혹은 특별한 날에 몰래 꺼내볼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제비 그림이 박힌 노란 종이 위에 새겨진 fecske라는 단어도 언젠가는 아무 의미도 없는 단어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반다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반사적으로 다시 담뱃갑을 구겨서 컴컴한 저 아래층으로 냅다 던져버렸다. --- pp.134-135
나는 그저 1분만이라도 단둘이 있고 싶을 뿐이었다. 소리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몇 마디 하고 싶어서 시끄러운 소음이 멎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두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 내 코를 그녀의 코에 갖다 대었다. 그녀의 숨에서 샴페인 향기가 났다. 아니, 내 숨에서 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두 사람의 심장박동을 느끼면서 우리는 가만히 있었다. 오케스트라가 힘차게 마지막 코드로 노래를 끝냈다. 박수 소리, 폭죽 소리, 환호 소리가 터져 나오기 직전, 삽시간에 조용해진 텅 빈 순간, 어쩌면 나의 목소리가 아닌지도 모를 목소리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 책 쓴 사람이 바로 나야. --- p.151
그녀가 순수문학클럽과 연줄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나처럼 말이 서투른 외국인을 결코 친절하게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의미론이니 기호학이니 해석학이니를 논하는 이 똑똑한 사람들이 무식한 아랫것들과 말을 섞는 일도 결코 없지만 말이다. 가구를 밀고, 마이크를 설치하고, 소리를 조절하는 데에야 헝가리어 몇 단어면 충분했다. 마이크 테스트, 하나, 둘, 셋…… 하루 일과가 끝나면, 유지 관리를 핑계로 집으로 녹음기를 가져와서 테이프들을 반복해서 들으며 실력을 늘려갔다. --- p.156
근데, 코슈터. 뭔가 이국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어. 크리슈카가 말했다. 이국적? 어떻게 이국적인데? 그 시, 헝가리 시 같지가 않아, 코슈터. 무슨 말이야? 그냥 그게 헝가리어로 된 시 같지가 않아, 코슈터. 난 그녀의 말보다도 크리슈카가 꾸밈없이 발음하는 그 모습에 불쾌해졌다. 그녀가 또 말했다. 마치 외국 말투로 쓰인 시 같아, 코슈터. 그녀는 이 문장은 아예 노래하듯 말했다. 나는 이성을 잃고 스파게티 접시를 들어 벽에 던져버렸다. --- p.188
내 기억 속에 이 사람은 없었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아주 멀찍이 보였지만, 그는 너무 가까이에 있었던 탓에 한눈에 알아보진 못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의 낭독을 듣지 못했음에도 그가 읽는 헝가리어 문장이 생소하지 않았다. 문장은 기억이 나는데, 상황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익숙한 집 안에 있으니 집 밖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 기분이었다. 애를 써보니 대략 스토리를 알 수 있었는데, 어느 곱사등이 정신분석가의 이야기 같았다. 이 단편소설은, 내가 틀리지 않다면, '토끼들을 심문 하다' 라는 글이었다.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쉰 목소리로 글을 읽는 이는 다름 아닌 바로 그 …… 선생이었다. 그런 섬뜩한 사건으로 가득한 이야기에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 p.191
그리고 그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 뭐라고? 그 책 말이야. 난 내 책이 아닌 책을 읽고 싶지는 않았다. 수치스러운 기분에 젖고 싶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강하게 요구하지도 않았다. 결국엔 내가 알아서 책을 읽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책을 내 허벅지 위에 두고 침대 위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나는 책을 들었고 책장을 펼쳤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서른 번도 더 읽었을 그녀에게 왜 굳이 또 이 횡설수설을 들려주어야 하는지 말이다. 그래도 문학작품이란 뉘앙스가 중요하거든, 크리슈카가 말했다. 그건 작가의 목소리로만 전달될 수 있거든. 그런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내가 이 책의 저자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줄 기회를 준 것이다. 나는 얼마간 지저분해져 손때로 번질번질한 표지에 찍힌 내 이름을 뜯어버리겠다고도 했지만, 크리슈카의 잔잔한 미소와 지친 눈빛, 거의 투명한 피부를 보자,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그녀는, 영원히 끌어안고 살고 싶은 이 책이 내가 쓴 책이라 믿고 계속 꿈꾸고 싶을 것이다.
--- pp.228-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