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엽은 광해군과 인척 관계의 가까운 인물이면서 동시에 조선시대에 가장 강력한 병력을 지휘하는 무장(武將)이었기 때문에, 반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서인 세력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래서 박엽의 문제점들을 실상보다 과장하고 이를 빌미로 박엽을 처단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인조와 반정 세력이 처한 정치 상황을 감안할 때 박엽을 나쁘게 묘사하고 그를 재빨리 죽여야 하는 단서를 그 속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즉 반정으로 집권을 하면 가장 중요한 일이 당시까지 조선의 종주국인 명나라의 인정을 받는 것인데, 그러려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이른바 중립 외교를 펼쳤던 광해군에게 비교해 볼 때 인조 자신은 정치 외교적 입장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점을 명나라에 더 명확히 보여주려면 광해군과 가까웠고 광해군의 외교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박엽을 처단하는 것은 정권을 차지한 이후의 첫 번째 과제로 결행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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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엽은 인조반정의 희생양으로 지목되어 집중적인 지탄을 받았지만, 오랜 세월 관료 생활을 통해 탁월한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국경 방비에 필수적인 축성(築城)과 양전(量田), 곧 전투식량의 확보와 비축 등 군사 관련 업무에서 두각을 보였다. 일찍이 1612년 호조(戶曹)에서 박엽을 호남의 양전사(量田使)로 추천하면서 “재국(才局)이 매우 민첩하고 산법(算法)에 밝아 양전의 임무를 맡기기에 가장 적합한 자”라 한 말이 있음이 그 증거이다. 실제로 영조 때에 박엽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다. 영조 6년(1730년) 11월에 삼남 지방의 토지와 수확된 양곡의 차이가 심각해 이를 해결할 방도로 양전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신사철(申思喆, 1671~1759)이 영조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갑술년 양전 시기에 박엽이 균전사가 되어 처음 법을 시행할 때 많은 이를 죽여 그 당시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양전이 다 끝나고 나니 백성이 손해 보는 일이 없고 요역이 공평하게 되어 이로써 원망하는 말이 없어졌습니다. (이와 같으니) 대개 양전은 반드시 행하여야 하는 일입니다.”
박엽이 그만큼 엄정하게 양전 업무를 수행했다는 평가가 그의 사후 100여 년 만에 회의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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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청나라 대군의 힘을 고려해 결사 항전이 아니라 화의를 주장해 관철한 최명길에 대한 재조명이 서적과 영화로 나와 최명길이 박엽에 대해 가졌던 생각이 재조명되고 있는데, 최명길이 인조반정 때 벌써 그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주목받고 있다. 반정 직후인 1623년 3월 12일 당시 병조 좌랑으로서 반정 세력의 일원이었던 최명길은 반정의 주동자였던 강계 부사 김류에게 “향후 나라에 병란으로 오랑캐가 염려스럽다. 장수의 지략을 가진 사람은 살려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다”라고 장수의 지략을 가진 박엽을 살려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류는 박엽이 광해군에 충성한 자라 반혁명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했고 3월 13일 박엽은 부임지 평양에서 도원수 한준겸에 의해 처형됐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날 무렵 최명길은 김류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 “만일 박엽이 살아있었다면 정묘호란도 없었을 것이고 오늘의 이런 우환도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인조반정 1등 공신 최명길이 광해군의 총애를 받고 양면성을 가진 박엽을 구명하려 한 것은 그의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더구나 후금의 침략을 예측하였기에 그의 존재가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비록 전 정권의 인물일지라도 경험과 능력이 국가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등용하는 게 최명길의 인사 철학이었다. 최명길은 정치와 외교의 요체가 뭔지를 아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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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엽에 대한 기억의 변화를 더듬어보면 18세기에 들어 이덕무의 기록에서는 그를 애써 변명하며 장점을 부각하려는 노력이 보이고,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평안도 지역 백성들이 그에 대한 기억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전승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매우 적극적으로 그의 삶 전체를 비범하고 신이(神異)한 내용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그의 죽음이 특히 안타까웠던 것은 그가 죽은 뒤 10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이 있었던 점이다. 그때 너무나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왔기에 사람들은 그전까지 국경을 안정적으로 지켜주던 박엽이란 관찰사를 되살려서, 그의 비범한 면모에다가 후금 오랑캐의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 오랑캐의 우두머리 누르하치까지 등장시켜 그를 그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설정하였다. 박엽과 같은 인물이 일찌감치 처형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박엽과 같은 존재가 절실히 요청된다는 바람은,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 사명대사의 영웅담이나 〈박씨부인전〉에 보이는 이야기에서 보듯 실현하지 못한 욕망에 대한 일종의 분출구 역할을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의 이미지나 명예는 완전히 회복될 수 없었다. 엄연히 실록 등 기록에 그것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 뒤의 연구가들이 아무리 박엽을 제대로 봐주고 싶어도 항상 그가 포악하고 잔혹했다는 기록이 상쇄되지 않았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일찍이 이러한 갈등을 인식하며 박엽에 대한 재평가의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단재는 박엽의 시대에 있었다는 박상희(朴象羲)라는 인물의 소문을 소설 형식으로 정리해 올렸다. 그 속에서 박엽이 여진족의 실태와 전략을 잘 알고 그에 대해 대비를 한 것이 사실은 박상희의 능력이었고, 그 인물을 알고 잘 썼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박상희의 소문이 진실인지는 별개로 하고, 박엽이 역사 속에서 진정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뜻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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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엽은 뛰어난 무장으로서 그가 평안 감사로 있는 동안에 여진족들이 감히 압록강을 넘어오지 못했는데,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자주 국경을 넘어왔고, 마침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연달아 일어나 임금 인조는 청나라의 용골대(龍骨大) 앞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해야만 했다.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끌려갔고 특히 양반 집 부녀자들도 많이 끌려갔다가 나중에 돈을 내고 돌아와서도 절개를 잃었다고 비난을 받아 자살하는 이들이 속출하는, 그야말로 최악의 민족적 비극이 일어났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때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던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이제 박엽을 죽인 것이 후회되겠지?” 하고 호통을 쳤다는 전설이 야담으로 전해 온다. 그가 죽자마자 여진족 청나라가 마음 놓고 북방을 유린하고 두 번의 큰 전쟁으로 모든 백성이 큰 고통을 당하게 되자, 박엽 장군의 위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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