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시무어의 초상화는 캐서린 왕비와 앤 볼린의 초상화와 달리 독일 출신의 궁정 초상화가 한스 홀바인 2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 1543)가 그렸다. 이어지는 네 사람의 초상을 담은 잉글랜드 행정청 화이트홀의 벽화 역시 홀바인 2세가 그린 것으로, 부모인 헨리 7세와 어머니(Elizabeth of York), 국왕 자신과 왕비 제인 시무어를 볼 수 있는데 원본은 169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것을 플랑드르 출신의 초상화가이자 유명 복제화가(copist) 레미기우스 반 렘푸트(Remigius van Leemput)가 다시 그렸는데 이 작품 역시 영국 왕실 초상화 중 매우 중요하고 유명한 그림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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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년대 약 10년의 기간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에 대한 흥미가 유행처럼 크게 번졌다. 구체적으로 튜더와 스튜어트 왕조 시기 내전의 소용돌이 등이 프랑스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월터 스콧 경(Sir Walter Scott)의 소설과 역사 등도 인기를 얻었다. 그림 ‘제인 그레이의 처형’은 역사적인 장면으로 잉글랜드에서 실제 이루어졌던 사실을 그린 것이었고 작자는 1825년과 1835년 사이 살롱(Paris Salon)에서 이른바 웅장한 장면을 잘 그려서 유명했던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쉬(Paul Delaroche, 1797~1856)이다. 이 작품에는 1553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6세의 죽음에 따라 여왕으로 선포되었던 헨리 7세의 증손녀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 1536~1554)의 마지막 모습이 담겨 있다. 반역죄로 사형을 언도받은 뒤 1554년 2월 12일 처형되어 죽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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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로쉬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하게끔 16세기 개신교도들의 순교 방식을 그림으로써 역사적 사실에 조작을 가했다. 제대로 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던 이 왕족 여인은 실제로는 옥외에서 처형되었다. 게다가 그림에서처럼 고래수염으로 속을 댄 코르셋과 19세기 양식의, 약간 낡은 흰색 공단(satin) 드레스는 입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머리는 위로 모아 올려진 형태였지 어깨까지 흘러내린 모습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는 완벽한 역사적 고증은 고사하고, 인기 있는 멜로 드라마와 통속적 읽을거리라는 특유의 무대 장면을 만들고 있다. 바다 건너 나라에 서 일어난 어쩌면 가슴 아픈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프랑스의 유명 화가는 유행하는 연극 속 무대 설정을 만들어 오로지 관객의 눈길을 끌기 위한 흥미만을 내세웠다. 아무튼 그녀가 비참하게 처형된 일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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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여왕의 초상화는 재위 기간 그려진 것으로, 그녀의 말년 모습이다. 병과 더불어 여러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얼굴에는 아직 강한 의지와 함께 시련을 이겨내고자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손에 들고 있는 장미 한 송이는 자식을 두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아직 힘이 미약하다고 여기는 그녀의 국가를 상징하는 것 같다. 그녀는 적지 않은 초상화를 남겼는데 표정들을 보면 한결같이 굳건하다. 그런 자세가 후임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이어진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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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년과 1828년 살롱에서 전시되었던 작품은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The Death of Elizabeth I, Queen of England)’으로, 여왕이 세상을 떠난다는 표면적인 주제와 달리 배경 속 여러 모습, 장치로 인하여 다소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세심하게 다루어진 소도구들, 즉 가구, 의상과 같은 장식들로 인하여 어쩌면 현대적 면모를 더욱 부각시켰다고 할 수 있다. 장면 전체를 보면 위쪽부터 어두운 배경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아래로 이어지며 점차 밝아지기 시작하면서 바닥에 면한 팔걸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죽음에 이른 여왕이 있는 곳은 마치 집중 조명을 받은 무대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다. 오른쪽 부분에는 관료, 장군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서 있는데 이는 여왕이 이룩한 정치 외교적 성공을 나타낸 것이다. 왼쪽에는 시녀들로 보이는 여인들이 큰 슬픔에 빠져 있다. 그렇게 내부적으로도 안정적 치세를 이룩했던 여왕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여왕의 얼굴과 드러난 팔은 이미 푸르스름한 상태이다. 들라로쉬답게 여왕보다는 그녀를 둘러싼 주변 모습을 통하여 그녀의 존재를 새삼스럽게 부각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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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보는 이들에게 의미 전달을 하기 위한 장미, 기도서와 같은 상징적 물건들을 엘리자베스 1세의 초기 초상화에서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후기 초상화에서는 자신의 제국을 나타내는 것들(지구, 왕관, 검, 기념 기둥)과 달, 진주와 같은 고전적 순수함이 복합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런 이면에는 ‘처녀 군주’를 표현하고자 하는 뜻도 담겨 있었다. 아버지 헨리 8세 때부터 튜더 왕실에서는 초상화 전통이 생겨났는데 채색 필사본(illuminated manuscript)에서 비롯된 초상화 미니어처도 그중 하나이다. 이 작은 인물 이미지는 매우 힘든 과정을 거쳐 양피지 위에 수채화로 그려진 다음 딱딱한 카드놀이 판 위에 접착되어 굳혀진 것이었다. 유화로 그려진 패널(panel)화는 철저히 준비된 소묘 위에 실물 크기로 그려졌다. 잉글랜드 궁정에서의 초상화는 외국 군주에게 선물로 주고자, 또는 드물게 예비 구혼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제작되었다. 이후 궁정은 여왕에 대한 그들의 헌신을 보여주기 위해 매우 상징적인 그림을 의뢰했으며, 엘리자베스 시대 후반기 잉글랜드 각 지방의 세련된 갤러리들은 초상화 세트로 가득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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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0년대부터 여왕에 대한 숭배 분위기가 서서히 만들어졌는데, 왕립초상화미술관 관장을 역임했던 미술사가이자 여왕 초상화 전문가 로이 스트롱 경(Sir Roy Strong)은 이를 두고 글로리아나 숭배의 시작이었다고 규정한다. 그는 그것이 공공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만들어졌으며, 더욱이 종교개혁 이전에 있었던 사이비 종교, 동정녀 숭배, 성인 숭배 등 일련의 가톨릭 또는 관련 이미지, 의식, 행사와 같은 세속적 행위들을 대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하여 여왕 즉위 기념일의 화려함, 궁정의 축시, 엘리자베스의 상징적인 초상화 등으로 그녀에 대한 숭배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했던 여왕의 이미지 관리와 홍보는 그녀의 통치 마지막 10년 기간에 절정에 다다랐다. 나이가 든 여왕의 사실적인 이미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실을 무시한 채 영원히 젊게 보이도록 만드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여왕이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남은 흔적을 지우고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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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커스 지어래츠 2세가 그린 것 중에서 아마도 여왕의 가장 상징적인 초상화는 허트필드 하우스의 ‘무지개 초상화(Rainbow Portrait)’일 것이다. 작품은 여왕이 60대였던 1600년에서 1602년경의 것으로, 이 그림에서 여왕은 마치 나이를 초월한 듯이 가면을 쓴 것과 같은 모습에 봄꽃으로 수놓은 린넨으로 된 의상과 한쪽 어깨에 외투를 걸치고 환상적인 머리 장식과 느슨한 머리카락을 드러내고 있다. 그녀는 눈과 귀를 가릴 수 있는 망토를 입고 있으면서 지혜의 뱀, 천공과 천구를 포함한 인기 있는 문장(emblem) 서식에서 찾아낸 상징을 착용하고 ‘non sine sole iris(태양 없이는 무지개가 없다)’라는 구호로 무지개를 실어 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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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빌은 엠마에게 제대로 된 거처를 제공하면서 그녀의 어머니를 불러 함께 살도록 했으며, 교양을 갖춘 여인으로 만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이름을 엠마 하트(Emma Hart)로 고치면서 자신의 모습을 우아하게 바꾸어나갔다. 그레빌은 친구들을 초청하여 사교 모임을 종종 열었는데 그때 화가 조지 롬니를 만나 그의 그림 속 모델이 되었다. 이로써 그녀의 미모가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때 롬니는 자신이 원하는 모델이자 뮤즈를 찾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고는 크게 감격하여 평생 함께 하고자 마음먹었을 정도였다.
엠마는 갑자기 런던에서 최고의 인기 있는 여인이 되었다. 롬니의 그림 속에 나타난 눈부신 미모의 젊은 여인 엠마는 런던 사교가에도 연결이 되어 그녀를 본 남성 유력 인사들은 충격에 빠졌다.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유머와 교양, 지적인 면모를 익힌 그녀는 타고난 미모와 함께 사람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롬니가 그녀에게 빠져들었듯이, 다른 화가들 역시 그녀에게 매혹되어 그림을 그리게 되면서 나중에 엠마를 나타낸 걸작이 되는 ‘몸가짐(attitudes)’의 전조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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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구현을 위하여 엠마는 나폴리의 의상 제조업자에게 나폴리만과 섬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주민들이 입었던, 자신이 롬니의 모델로서 자주 입었던 헐렁한 옷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그녀는 짧은 오버 스커트(tunic) 몇 개와 커다란 숄 또는 면사포와 짝을 지어서 접힌 천으로 몸을 감싼 후,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인기 있는 이미지를 나타내는 방식으로 포즈를 취했다. 그런 연출로 관객들은 엠마가 묘사한 고전적인 캐릭터와 그 당시 장면, 신화 속 명칭을 알아맞히게 하는 일종의 사극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신화 속의 메데이아(Medea)로부터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하여 그리스의 여러 여신을 나타냈는데, 이때 프랑스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도망쳐 나폴리로 왔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속 화가 엘리자베스 루이스 비지 르 브렁(lisabeth Louise Vige Le Brun)이 그녀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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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코코 미술은 프랑스 중심이었으며, 그 특징을 간단히 말한다면 매우 화려한, 화려함의 극치를 나타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은 왕가와 귀족 및 막 자리를 잡아가던 부르주아 계층의 생활의 한 단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화려함의 경쟁 속에 사치와 향락이 이어지면서 사회 계층 사이의 골이 깊어져만 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부 격차에 따른 질투와 분노로 인하여 결국 프랑스는 엄청난 상처를 동반한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아무튼 퐁파두르 부인을 그린 그림 대부분이 프랑수아 부셰의 것들인데 그렇게 이루어진 그림들 역시 이전에 그려진 작품들과 비교하여 화려한 기법과 분위기가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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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를 그린 초상화는 그리 많지 않다. 아무리 찾아봐도 이 그림에 나타난 모습이 거의 유일하며, 이를 토대로 희화(??)화 되거나 무섭고 잔인하게 고쳐 그린 것들만 있을 뿐이다. 물론 프랑스 혁명기를 그린 기록화에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 실린 초상화를 보면, 그토록 많은 논란의 주인공임에도 얼굴은 그냥 머리 좋고 소극적이며, 내성적인 사람 중 하나로 보인다. 그는 프랑스 혁명기 공포 정치를 단행했으며 결국 자신조차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던 단두대에 의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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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파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마라의 절친이었던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가 그린 ‘마라의 죽음(The Death of Marat)’은 꽤 유명한 작품으로 남아 있다. 작가는 심각한 피부병을 앓고 있던 마라를 깨끗하고 흠결이 전혀 없이 처리하면서 카펫, 종이, 펜 등 다른 세부 사항 역시 정리한 듯 그렸다. 다비드는 친구의 동료들, 즉 자신의 정치적 동지들에게 마라를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글을 썼던 것’으로 묘사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켰다. 아울러 마라의 왼손에 쥐어진 종이에 샤를롯 코르데라는 이름까지 분명히 표기했다. 작품은 크게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공포 정치 시대 지도자들이 작품의 복제품을 다수 주문하여 주위에 전달했다. 아울러 1793년부터 1794년까지 다비드의 제자들이 참여하여 선전 선동을 위한 복제품들을 다시 만들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 일파의 실각과 처형 이후 작품의 유행은 줄어들었고, 다비드의 요청에 따라 1795년에 제작이 중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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