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박띠 요가
이슈와라의 숭배자와 악샤라(눈에 보이지 않는 불멸의 존재)의 숭배자들 중 누가 더 우수한가?
이제 아르주나는 신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게 된다. 제2장에서 시작하여 제10장까지 신의 영광들에 대하여 다루는 가르침들에서, 당신은 어떠한 조건들도 없는 지고의 나, 불멸의 브람만을 숭배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또한 모든 진화의 과정을 수행하고 모든 것을 아는 힘을 가진 에너지(삿뜨바)의 조건들과 결합된 우주의 신으로서의 당신 자신을 숭배하라고 여기저기에서 가르쳤다. 그리고 우주적인 모습을 다룬 제11장에서, 당신은 온 우주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이슈와라로서의 당신의 근원적인 모습을 보여준 뒤 그것을 숭배하라고 하였다. 그 모습을 보여준 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만 일하라고 간곡히 타일렀다(제11장 55절). 그러므로 아르주나는 이 두 가지 방법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은지 알고 싶어 질문한다.
아르주나가 말했다.
1. 이와 같은 현현의 당신을 한결 같이 명상하는 헌신자들과 불멸이며, 나타남이 없는 당신을 명상하는 헌신자들 중 누가 요가에 더 자리를 잘 잡습니까?
‘이와 같은’은 앞서 (제11장 55절에서) ‘나를 위해 일하는 사람’ 등으로 말한 것을 가리킨다. ‘한결 같이’는 확고한 마음으로 중단 없이 신을 위해 일하고 앞에서 가르친 다른 것들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헌신자들은 다른 누구에게서도 안식처를 찾지 않고, 앞서 나타난 우주적인 모습으로 있는 당신에 대해 명상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든 욕망을 버리고 모든 행위들을 포기한 채, 불멸의 브람만에 대해 명상한다. 그 브람만은, 앞에서 말했듯이, 어떤 조건들도 없으므로 나타남이 없는 즉 감각들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감각들에 보일 수 있는 것을, ‘비약따’라는 단어의 어원이 암시하듯이, 나타난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이 불멸은 나타남이 없다. 후자의 사람들은, 다음에 열거되는 여러 특성들에 의해 규정되는, 사라질 수 없는, 나타나지 않는 존재를 명상한다. 두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누가 요가에 더 정통한가?
이슈와라의 숭배자들
신은 말한다. 바르게 보고 욕망들을 포기했으며 불멸(악샤라)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놓아두어라. 그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께서 말씀하셨다.
2. 지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늘 확고히 그들의 생각을 나에게 고정시키고 나를 명상하는 사람들이 나의 견해로는 최고의 요기들이다.
그러한 헌신자 즉 박따들은 우주적인 모습으로 있는 지고의 신인 나에게 그들의 마음을 고정시키고, 모든 요가 스승들을 주재하는 신으로서 나를 숭배한다. 주재하는 신인 나는 전지하며, 나의 비전에는 애착과 다른 나쁜 열망들의 침침함이 없다. 앞 장의 마지막 절에서 열거한 방식대로 언제나 나를 확고하게 묵상하며 지고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헌신자들은 내 생각에 최고의 요기들이다. 정말로 그들은 밤낮으로 끊임없이 나를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최고의 요기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다.
악샤라의 숭배자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최고의 요기들이 아닙니까? 잠시 멈추고, 그들에 관해 내가 하 는 말들을 들어 보라.
3-4. 모든 감각들을 제어하면서, 항상 차분하며, 모든 존재들의 안녕을 바라면서 불멸의 존재, 정의할 수 없는 존재, 나타나지 않는 존재, 어디에나 있는 존재, 생각할 수 없는 존재, 변화할 수 없는 존재, 불변의 존재, 영원한 존재를 늘 명상하는 사람들, 그들 역시 나Myself에게 올 것이다.
불멸의 존재인 악샤라는 나타남이 없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정의될 수 없다. 그는 나타남이 없으며, 어떠한 지식의 기관들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에 서나 항상 불멸의 존재를 명상한다. 명상은 명상의 대상을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명상함으로 써 다가가며, 흘러내리는 기름 줄기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동일한 생각의 흐름 속에 오랫동안 꾸준히 머무르는 것이다. 명상의 대상인 불멸의 존재는 다음과 같은 특성들로 묘사된다. 그는 어디에나 편재해 있으며, 공간처럼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다. 그는 나타남이 없기 때문에 그를 생각할 수가 없다. 감각들에 보이는 것들은 무엇이나 마음에 의해서도 생각될 수 있지만, 불멸의 존재는 감각들에 보이지 않으므로 생각될 수도 없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꾸따스따). ‘꾸따’는 겉보기에는 다 좋지만 속은 나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여기에서 무지와 다른 것들을 포함한 세상의 씨앗을 가리키며, 그것의 속은 악한 것들로 가득 차 있고, 스베따스바따르 우빠니샤드(제4장 10절)와 기따(제7장 14절)에서 보듯이 마야, 분별되지 않은 등 다양한 용어들로 불린다. ‘꾸따스따’는 마야의 목격자로서, 마야의 신으로서 마야 안에 자리하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혹은, ‘꾸따스따’는 산더미처럼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는 불변하며 영원하다. 불멸의 존재에 대해 명상하고 모든 감각들을 억제하며, 좋아하는 것을 만나든지 싫어하는 것을 만나든지 언제나 평정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나 자신에게 온다. 실은 그들이 나에게 온다고 말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현자는 바로 나의 나로 여겨진다.”(제 7장 18절)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최고의 요기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신 자신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5. 생각들을 비현현에 고정시키는 사람의 어려움은 더 크다. 왜냐하면 몸을 가진 사람들이 비현현의 목표에 이르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나를 위한 일을 행하는 데 전념하는 등의 사람들의 어려움은 정말로 크다. 그러나 그들 자신을 불멸과 동일시하며 지고의 실재를 명상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은 훨씬 더 크다. 그 어려움은 몸에 대한 집착을 포기해야만 하는 필요성 때문에 생긴다. 몸을 가진 사람들, 몸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목적지인 불멸에 이르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러므로 그들의 어려움은 더 크다.
이슈와라의 숭배에 의한 구원
나중에, 우리는 불멸의 숭배자들의 삶의 행위에 대해 얘기할 것이다.
6. 자신의 행위들을 나에게 포기하고, 나를 지고의 존재라 여기고, 나를 전적인 헌신(요가)으로 명상하는 사람들,
7. 그들의 생각들은 나에게 고정되었기 때문에, 오, 쁘리따의 아들이여, 나는 오래지 않아 죽음이 있는 삼사라의 바다로부터 그들을 구하는 구원자가 된다.
‘나’는 주(主) 이슈와라를 가리킨다. ‘전적인’이란 우주적인 모습의 신인 나 자신 외에는 다른 어떤 숭배의 대상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헌신(요가)’은 사마디 즉 마음의 확고부동함을 말한다. 오로지 신인 나만을 전적으로 명상하는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바다에서 들어 올려질 것이다. 그들의 생각이 우주적인 모습의 나에게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사라는 바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로질러 건너는 것이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8. 그대의 마음을 나에게 전적으로 고정시켜라. 그대의 지성을 나에게 전적으로 고정시켜라. 그러면 그대는 의심의 여지없이 곧 나와 하나가 될 것이다.
우주적인 모습의 신인 나에게 그대의 마음을, 그대의 목적과 생각들을 고정시켜라. 결심하고 결정하는 그대의 지성 또한 나에게 고정시켜라. 그 결과는 무엇인가? 들어라. 그대는 분명히 이 몸이 죽을 때 내 안에 거할 것이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비야사(수행)의 요가
9. 만약 그대가 그대의 생각을 나에게 변함이 없이 고정시킬 수 없다면, 그때는 끊임없는 요가의 수행으로 그대는 나에게 이르기를 구해야 한다. 오, 다난자야여!
만약 내가 말한 대로 그대의 생각을 나에게 지속적으로 고정시킬 수 없다면, 부단한 수련의 요가를 통해 우주적인 모습의 나에게 도달하기를 구하라. 수련이란 생각을 사방에서 철수시켜 하나의 특정한 대상에 거듭하여 고정시키는 것이다. ‘아비야사 요가’는 그런 수련을 통해 얻어진 사마다나 즉 마음의 확고부동함을 의미한다.
신에 대한 봉사
10. 만약 그대가 수행조차도 할 수 없다면, 그때는 나를 위하여 행위를 하라. 나를 위하여 행위를 하여도 그대는 완성에 이를 수 있다.
비록 그대가 요가의 수련 없이 단지 나를 위한 행위만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대는 완성에 이를 것이다. 그대는 먼저 마음이 순수해질 것이며, 다음에는 요가 즉 확고부동함에 이를 것이며, 그 다음에는 지식에 이르고, 마지막으로 완성에 이를 것이다.
행위의 결실들의 포기
11. 만약 그대가 이것조차도 할 수 없다면, 그때에는 나에 대한 헌신에 피난하고는, 모든 행위의 결실들을 포기하고, 자제하면서 행위를 하라.
만약 그대가 방금 전에 들은 것처럼 나를 위한 행위를 하는 데에도 열중할 수 없다면, 행위를 하되 그 모든 것을 내 안에서 포기하고, 그 행위의 결실들을 포기하라.
이제 그는 모든 행위의 결실들에 대한 포기를 찬미한다.
12. (기계적으로 하는 의식의) 수행보다 (책의) 지식이 더 낫다. (책의) 지식보다는 명상이 더 낫다. 명상보다는 행위의 결실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낫다. 포기하면 평화가 즉시 온다.
지식은 무지를 동반하는 수행보다 더 낫다. 그런 지식보다 나은 것은 지식을 갖춘 명상이다. 지식을 갖춘 명상보다 나은 것은 행위의 결실들에 대한 버림이다. 앞서 말한 요건들을 갖추고서 행위의 결과들을 그렇게 버리면, 세상과 그 원인이 즉시 그치게 된다. 그것은 지체될 여지가 없다.
행위에 열중하는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행위의 결실들을 포기하는 것이 희열에 이르는 방법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배운 방법들을 따를 수 없을 때에만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모든 행위의 결실들을 버리는 행위는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우월하다는 선언에 의해 찬미된다. 왜냐하면 그 길은 어떤 사람이 앞에서 가르친 길들을 따를 수 없을 때 택해야 하는 과정으로 가르쳐지기 때문이다.
그 선언은 어떤 면에서 찬미가 되는 것인가?
까따 우빠니샤드(제6장 14절)에서는 모든 대상에 대한 욕망들을 버릴 때 불멸에 이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진실이다. 그리고 모든 대상에 대한 욕망들은 계시서와 전승서에 언급된 행위들의 결과이다. 한결 같이 명상에 전념하고 있는 깨달은 사람의 경우에는 욕망을 포기하자마자 즉시 평화가 뒤따른다. 이제, 욕망들에 대한 단순한 포기는 심지어 무지한 사람의 경우에도 행위의 결과들에 대한 버림의 한 요인을 이룬다. 그리고 이런 유사점 때문에, 모든 행위들의 버림에 대한 단순한 버림을 찬미하며, 이것은 그 길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이는 영적 계급(브람마나)의 현자 아가스띠야가 바닷물을 다 마셔 버렸는데, 이 시대의 브람민들조차도 그들 역시 브람마나라는 이유만으로 칭송받는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이 행위의 결실들을 버리면서 행하는 행위의 요가는 희열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 이라고 가르쳐지고 있다.
악샤라 우빠사까(불멸의 숭배자)들의 삶
여기에서 우주적인 모습의 신에게 생각을 집중하는 요가 그리고 신을 위한 행위의 수행에 대한 가르침은 이슈와라와 아뜨만, 신과 나의 구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이것조차도 할 수 없다면”(제12장 11절)이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행위의 요가는 무지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암시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신이 말하는 뜻은 행위의 요가는 (신과 나 사이의) 분별을 보지 않는 사람인 악샤라의 숭배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신은 까르마 요기는 악샤라를 숭배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설명을 하자면, 신은 “그들 역시 나Myself에게 올 것이다.”(제12장 3절)라는 구절에서 악샤라의 숭배자들은 해방의 성취에 관하여 독립적이라고 선언한 뒤, “그들을 위해서 나는 구원자가 된다.”(제12장 7절)라는 구절에서 다른 사람들은 신에게, 외적인 존재에게 의지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만약 그들이 신의 바로 그 나로 여겨진다면, 그들은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신이 바로 불멸(악샤라) 자체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신에게 구원받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게다가, 아르주나가 잘 되기를 무척 바라는 신은 그에게 행위의 요가만을 권하는데(제4장 15절), 행위의 요가는 구분이라는 개념에 근거한 것이며 올바른 지식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지식의 적절한 원천들을 통하여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다른 존재에게 종속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둘은 서로 상반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신이 불멸에 이르는 직접적인 수단을 이루는, ‘어떤 존재에 대한 미움의 부재’와 같은 특성들을 가르치는 것은 모든 욕망들을 포기하고 올바른 지식에 헌신하는 산야신들, 불멸(악샤라)의 숭배자들에 대한 것이다.
13. 어떤 존재도 미워하지 않는, 모든 이에게 다정하고 자비로운, 집착과 자아가 없는, 고통과 기쁨이 동일한, 참을성이 있는,
14. 늘 만족하고, 마음이 안정적인, 자신을 다스리는, 확고한 신념이 있는, 생각과 지성을 나에게로 향하게 하면서 나에게 헌신하는 사람은 나에게 소중하다.
그는 아무것도 싫어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것조차 싫어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존재들을 그 자신으로 여긴다. 그는 다정하고 자비롭다. 그는 고통 받는 사람들 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존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는 산야신이다. 그는 어떤 것도 ‘나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이기심이 없으며, ‘나’라는 개념이 없다. 고통과 즐거움은 그에게 싫어함과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는 모욕을 당하거나 맞아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는 항상 만족한다. 그는 몸을 유지하는 수단을 얻건 얻지 못하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또한 좋은 것을 만나건 좋지 않은 것을 만나건 만족한다. 그는 요기이며, 언제나 마음이 확고부동하다. 그는 나의 성품에 대하여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 산야신은 그의 목적과 생각(마나스)과 결정의 능력(붓디)을 오로지 나에게로 향한다. 그러한 헌신자는 나에게 소중 하다. 앞서 말한 “나는 그 지혜로운 자에게 매우 소중하고, 그는 나에게 소중하다.”라는 제7장 17절과 같은 진실이 여기에서는 길게 표현되었다.
15. 세상에 고통을 주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고통을 받지 않는, 쾌락, 분노, 두려움, 걱정이 없는 자는 나에게 소중하다.
‘그’는 산야신이다. ‘기쁨’은 욕망의 대상을 얻어서 마음이 들뜨거나 흥분된 상태를 말하며, 소름이나 눈물 등으로 표현된다.
16. 원함으로부터 자유롭고, 순수하고, 영리하고, 무관심하고,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모든 계산된 행위를 포기한 그, 그래서 나에게 헌신하는 그는 나에게 소중하다.
그는 몸, 감각, 감각 대상들과 그것들의 상호관계에 무관심하다. 그는 안팎으로 순수를 유지한다. 그는 신속한 처리를 요구하는 문제들을 당했을 때 즉시 바르게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는 친구 등의 편을 들지 않는다. 그는 이번 생에 속하건 다음 생에 속하건 욕망의 대상들을 얻고자 계산된 모든 행위들을 습관적으로 포기한다.
그리고,
17. 기뻐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비통해하지 않고, 욕망이 없고, 좋음과 나쁨을 포기한 그, 완전히 헌신하는 그는 나에게 소중하다.
그는 탐나는 것을 얻어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는 원치 않는 것을 받을까 봐 초조해하지 않는다. 그는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져도 슬퍼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에게 없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18. 적과 친구, 명예와 불명예, 더위나 추위, 즐거움과 고통에 같이 있고,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운,
19. 비난과 칭찬이 동등하고, 조용하고, 모든 것에 만족하고, 거처가 없고, 마음이 안정적이고, 헌신으로 가득한 그, 그 사람은 나에게 소중하다.
그는 어떤 종류의 대상들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몸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것들에도 만족한다. (마하바라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것이라도 입고, 어떤 음식이라도 먹으며, 어디에서도 자는 사람, 신들은 그를 브람마나라고 부른다.”(샨띠빠르바, 목샤 다르마, 245-12)
그는 고정된 거처를 갖고 있지 않다. 또 다른 전승서에서 말하듯이, 그에게는 “집이 없다.” 그의 생각은 끊임없이 지고의 실재에 고정되어 있다.
지고의 실재를 아는 지식에 끊임없이 헌신하는 불멸의 존재(악샤라)의 숭배자, 산야신들의 다양한 특성들에 대한 제12장 13절에서 시작되는 열거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어진다.
20. 이제까지 기술한 이 불멸의 다르마를 따르고 나를 지고자로 여기며, 헌신하는 이들은 나에게 지극히 소중하다.
‘이제까지’는 제12장 13절부터 시작되는 부분을 가리킨다. ‘불멸의’는 불멸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나를 지고자로 여기며’는 나를 자신의 비할 바 없는 최고의 목적지로 불멸의 나로 여긴다는 뜻이다. ‘헌신하는’은 지고의 실재를 아는 지식인 지고의 헌신에 의지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포기자 즉 산야신을 가리킨다. “나는 그 현자들에게 극히 소중하다.”(제7장 12절)라는 구절에서 암시되는 것이 충분히 설명되었고, 여기서는 이와 같이 결론지어진다. “그들은 나에게 지극히 소중하다.” 이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즉, 지금 설명된 불멸의 법을 따르는 그는 지고의 신인 비슈누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된다. 따라서 해방을 추구하는 모든 구도자는, 비슈누의 지고의 거처에 이르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은 이 불멸의 법을 열심히 따라야 한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