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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입니까

[ 반양장 ] 청색지소설선-06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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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2월 29일
판형 반양장?
쪽수, 무게, 크기 308쪽 | 125*190*30mm
ISBN13 9791189176891
ISBN10 1189176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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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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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겨놓은 그는 겉으로 보기에 말끔해 보였다. 그러나 옷으로 가려놓은 그의 몸 곳곳에는 내가 만들어놓은 무늬들이 자라나고 있다. 그것들은 나의 이 모양을 따라 붉은 꽃을 피우기도 하고, 나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마다 멍울멍울 검푸른 자국을 남겨놓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가족들이 그 사실을 알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가족들이 그의 옷을 들춰 그의 몸에 찍힌 현란한 무늬들을 볼 확률은 0에 가깝다. 그의 가족들이 그가 빨리 죽기만을 바란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몸에 무늬를 남겨놓은 것은 아니지만, 안심은 된다. 그의 마지막 순간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무늬」중에서

오십 번지에는 한 명의 노인과 두 명의 노파가 살고 있었다. 한 명의 노파는 한 명의 노인을 ‘여보’라 명명했다. 또 다른 한 명의 노파는 한 명의 노인을 ‘아빠’라 불렀다. 그리고 이 노파는 다른 한 명의 노파에게 ‘언니’라고 했다. 당연하게도 언니라 불린 노파는 또 다른 노파를 ‘동생’이라 불렀다. 한 명의 노인은 한 명의 노파에게는 ‘당신’이라고 했고, 또 다른 한 명의 노파에게는 ‘이쁜이’라고 했다. 여보이기도 하고 아빠이기도 한 노인이 이쁜이이기도 하고 동생이기도 한 노파를 이쁜이라 부를 때마다 당신이기도 하고 언니이기도 한 한 명의 노파는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이건 옛날이야기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얼핏 보면 대단히 복잡한 것 같은 이들의 관계를 도식적으로 설명하면 간단하기 이를 데 없지만, 이건 옛날이야기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기 때문에 이들의 관계가 간단히 정의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다만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에 대한 독자의 편의를 고려하여 그들에게 이름을 부여한다. 그렇지만 이 이름들은 모두 가명이다.
---「오십 번지 서쪽」중에서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돌아 다시 그 날이 옵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이 죄가 되던 그 시절에 우린 모두 죽은 듯이 살았습니다.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서로를 경계하고 눈치를 봤지요.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예의를 지키는 일이란 그렇게 자연스러운 이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부서진 시간을 바라보며 똑같이 자신의 시간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마음 놓고 아파할 수 있도록 시간을 굴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이 노엽게 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누구도 아픈 기억의 나이테를 그리지 않아도 되게 말이지요.

또 바람이 부네요. 아까 속엣것을 게우고 났더니 이제 좀 괜찮습니다. 그러나 바람은 계속해서 불어 올 것이고, 그럴 때마다 울컥울컥 욕지기가 나겠지요. 그러면 당신, 아무 말 말고 조용히 나의 손을 잡아주세요. 그리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세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아주 충분해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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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응답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의 담론을 이야기한다. 어림하기는 어렵지 않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알려 하는 것이 그렇다. 자신의 생래적 결핍을 인지하고 언제나 지혜를 갈급하는 애지자(愛智者)로서 에로스의 속성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단정하는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자신이 기술하고 있는 현상들에 대하여 『사랑, 입니까?』라고 묻는 이 소설집은 그래서 더 믿음직스럽다. 인식을 위해 형체를 갖추는 순간 그 존재를 잃고 사라지는 ‘혼돈’의 우화처럼 사랑 또한 그 현상을 규정하려고 애쓰는 순간 반드시 실패하고야 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 김대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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