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한 그루쯤 서 있고 철로가 있으며, 반사경과 녹슨 벤치가 하나 있는 역. 언젠가 당신이 모든 걸 잃어버렸을 때 찾아올 수 있는, 수많은 역 속의 그런 역으로 있을게요. 나는 무광의 광물처럼 낡아 있을게요. 그때 비로소 내가 묘사하는 당신이 실제의 당신보다 더 아름다우리라는 걸 나는 믿어요 .
--- p.10
조금 늦었다고 싶은 봄눈들 청년의 사랑, 시는 스물의 장르라고 생각했었다. 의자를 놓고 커튼을 치고 스스로 그어놓은 슬픔의 원 한가운데 앉아있는 날들이 많았다. 슬픔을 받아 주머니에 찔러 넣지 않으면, 거리를 걸어 나갈 수 없는 나이가 바로 스물이었다.
--- p.14
생각을 소비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 생각을 생산해야겠다는 마음. 한 달에 하루쯤은 의도적으로 온종일 아무 생각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눈과 귀를 주머니에 넣고 있어 볼 생각이다. 이거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일단 건강해야 한다.
--- p.28
찬비 오는 밤 부둣가 대구횟집 난전 파라솔 아래 앉아 모든 것에 실패한 마음으로 혼자 외상술 마시는데 아무도 없는 밤, 초췌한 몰골의 어린 비구니가 말없이 와 비 맞고 서서 목탁을 두드린다. 파리한 얼굴 어느 절에서 등 떠밀려 왔는가 묻지 못하고 주머니를 뒤적여 이 천원 시주하고 합장한 뒤, “스님 260자 반야심경 한 번 독송해주세요”, 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사리자여. 관자재보살이 그러했느니라. 모두가 비었음을 비추어 보고 모든 괴로움을 여의었느니라.
--- p.30
회사 부도를 내고 수도권 아파트와 사무실 창고 지방의 토지를 다 날려 먹고 지방으로 이사와 실의에 빠져있을 때 세상을 등지고 돌아누워만 있을 때 하루는 등 뒤에서 끼리릭 끼릭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등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 p.43
비굴은 반드시 젖는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울게 되어 있다. 그리하리니 그리하다. 나와 세상의 비굴을 엮어 벽에 걸어두었다. 비굴만큼 맛있는 이야기도 드물지. 한 가지 위로라면 바람이 불어 비굴이 잘 마르고 뒤집어질 때 떡하니, 굴비!
--- p.50
흑과 백은 액체에 가깝다. 서로 엉겨있기도 하고 풀어지기도 한다. 습한 색, 그것이 흑과 백이다. 올라타고 빨고 스미고 나누고 더하며 그것들은 함께 있다. 그것들의 본질은 안개와도 같다. 모든 칼라는 흑백 속에 있다. 네 삶의 흑백들을 흔들어라. 너만의 노랑 빨강 연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 p.59
내가 혼자인 내가 모든 어둠을 체로 걸러내고서야
잠시 보는 당신이 아니었는가.
언제 당신은 내 안에만 있으려나.
그믐달, 여름 하늘을
괄호를 열며 괄호를 열며 가는 당신.
--- p.65
코스모스가 핀다. 가느다란 대에서 문득 화려하진 않으나 수수한 색감의 잎을 펴 보이는 꽃이 코스모스다. 활짝 핀 코스모스의 암술과 수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에! 별 속에 작은 별 모양들이 총총히 꽃잎 속에 떠서 있다.
--- p.90
예술가란, 비어있는 무한의 하늘에 창을 내는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예술가의 삶이 고단하고 가난하나 그들이 이뤄놓은 예술의 경지는 아름답다. 분야와 장르를 떠나 그들의 예술은 많은 이야기를 거느리고 있으며 신비한 빛과 색을 내뿜는 한 잔의 칵테일 같은 것으로 어느 날 마주친다.
--- p.104
빛과 빚은 언제나 붙어 다닌다. 빛이 있으므로 빚이 있는 것이다. 빛을 보기 위해 빚을 내어 집을 사고 사업을 한다. 빚으로 빛을 만드는 일은 연금술보다는 성공확률이 높지만 실제로는 1% 성공도 어렵다. (중략) 딜레마, 딜레마의 연속이 삶이다. 빛과 빚을 가까이서 잘 들여다보라. 너무나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다.
--- p.107
고요함에 나 앉아 있고 나 서 있다. 고요함에 문을 달고 구름과 하늘이 그어놓은 물의 선을 본다. 물의 선은 산 능선 위에도 있고 폐선의 옆구리에도 있고 사람의 손바닥 위에도 있다. 낮 바다다. 때로 검은 손이라도 잡고 싶은 게 인간일까. 고요
함의 계단에 내려가는 방법이 더 필요하다. 고요의 바닥에 물이 찰랑거린다. 움직이는 바닥 그것은 늘 내 것이었다. 찰랑거림에 서 있기를, 나도 찰랑거리다가 흐르기를,
--- p.126
다가서는 벽마다 나에 대한 조롱이 써졌다 지워진 것만 같다.
당신은 도착했을까 내가 모르지만, 알 수도 있는 사람.
형, 골목길에 갇힌 것 같아 늘 이곳이야. 하고 싶은 말을 끝내 참았다. 마로니에 넓적한 잎 다 져버린 술집 불빛 뒤 캄캄한 곳으로 더 캄캄한 곳으로 막다른 어둠에는 계단이 있을 것만 같아서 발을 들어 허공에 올려 보았다.
--- p.129
20년 동안 주식회사 다섯 개를 세웠지만, 결국엔 다 망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성공하려고 주식회사를 설립했으나 반드시 성공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성공하려고 문학을 하고 성공하려고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듯이. 만약 그랬다면, 수십 년 동안 내 마음에 남아있는 이 가득함은 무엇인가.
--- p.132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결핍을 느낄 때가 있다. 내가 가난한 축에 든다는 것. 그럴 때면 나는 내 가난을 단정하게 고쳐놓고 밖으로 나간다.
--- p.139
어느 날 몸뚱이만 있었던 달팽이는 자기 안으로 깊게 들어가 자신을 바라보고 싶었지. 달팽이는 처음에 그 방법을 몰라 자신의 몸에 점을 찍어보았어. 그 점에 자신의 인식을 덧씌우고 덧씌웠지. 거기에 세속적인 욕심이 있을 리 없었겠지. 자신을 파고 또 파고 그걸 또 돌려보았지. 아니 스스로 돌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 보니 나선형의 자기 집이 생겼어. 각질이었지만 모두가 자신의 몸에서 나온 것이었어. 그 순간 자기 속으로만 들어가려던 달팽이는 놀랐어. 밖으로 나갈 수도 있는 문도 생겨나 있었지. 달팽이의 유전자는 그때 알았던 거야. 안으로 자기 안으로 자꾸 들어가면 자신의 바깥에서 나가는 문도 동시에 생겨나고 생겨난다는 것을. 모든 건 동시에 이뤄진다는 것을.
--- p.162
백열등은 점점 나이가 들어, 화려했던 젊은 시절을 뒤로하고 물러나는 오십 대 이후의 사내들을 닮아있다. 젊고 감각적인 것에서 밀려나 아직 자기가 필요한 곳에서 묵묵히 자기만의 빛을 품어 내는 백열등은 마치 어둠을 밀고 사람을 대신 앉게 하는 여유가 있다. 부둣가 파시에는 바다 안개와 어울려 줄줄이 난전 처마에 매달려 있어 고단과 행복이 친구 같은 것임을 일깨워준다. 보라! 나는 지금껏 백열등만큼 따뜻한 불빛을 본 적이 없다.
--- p.166
새우는 죽어서야 등을 굽히고
시장 사람들은 죽어서야 등을 편다.
다행이다. 바다 곁의 이야기라서.
--- p.175
사람이 울고 있으면 내 고막이 하얘진다. 듣는 자에게도 앞 사람의 사막이 보인다. 고막도 하나의 막 누군가의 울음에 찢어질 듯 울리다가 바깥과 안의 나무문이 되어 삐걱거린다. 혼자 있는 방은 공기 방울같이 둥글고 귀만 살아있다. 산 아랫마을에서 시작한 빗소리도 귓가에 닿으면 하얘진다. 병원에 가 귀를 고치고 당분간은 견디고 지낼만한 고막 한 채 얻었다. 어서 가자
--- p.198
사람의 슬픔이란
다 각자의 계단을 갖고 있어서
오르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다가
결국은 비극을 맞게 되지만,
비극이라는 것만큼 안심되는 건 없지
나는 불완전한 물질을 사랑했네.
--- p.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