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망 지갑을 구경하다가 옛날 증명사진을 봤다.
“까망 고딩 때야? 자기 티부*였구나?” *티 나는 부치(Butch)의 약어.
“귀엽지? 파랑은 고딩 때 어땠어?”
“나는 그냥 긴 머리 묶고 다녔어. 여성스럽게 다니라고 맨날 엄마가 뭐라고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날까 봐 무섭기도 했고. 까망은 그런 거 없었어? 나도 그랬긴 했는데, 멋있는 머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아. 그리고 그때 보아 울프컷? 샤기컷? 그런 스타일이 유행이었어!”
“왠지 까망은 짝사랑 안 해 봤을 듯. 그치?”
“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너무 어려워. 날 안 사랑해 주면 내 마음도 금방 식어 버려.”
“나는 짝사랑하면서 너무 힘들었는데. 나는 왜 여자를 좋아할까, 나는 왜 여자를 좋아해서 이렇게 불행해야 할까? 이러면서. 짝사랑을 안 해 봤으면 부정하고 자책하느라 힘든 건 별로 없었겠다.”
“응… 그런 고민은 안 했던 것 같아.”
“나는 그때 생각하면 왜 그렇게 힘들어했을까 후회돼. 자책하지 않아도 됐는데, 왜 그렇게 나한테 모질게 굴었을까? 바보 같고 속상해.”
“그때 파랑한테 말해 주고 싶다. 너 잘못한 것 없어. 너무 억누르려고 애쓰지 마. 괜찮아. 이제는 맘껏 사랑하자. 좋은 건 다 표현해도 돼. 알았지?
“응.”
“근데, 잠깐만. 누구를 그렇게 열렬히 사랑했어?”
---pp.57~61 「1장 08. 이젠 맘껏 사랑하자」 중에서
엄마는 냐옹이 줄리를 키운다.
“줄리 수염이네. 우리 줄리가 일부러 엄마 책상에 수염 두고 간 거야?”
엄마는 종종 줄리 수염을 챙겨 뒀다가 가족들에게 나눠 준다.
“줄리 수염 가져가서 지갑에 넣어 둬. 오, 이번 건 길고 굵다.”
우연히 발견한 고양이 수염을 나누며 행운을 주고받다니!
“이게 다 줄리가 이뻐서 그래.”
이번에는 엄마한테 받은 수염을 까망 차에 두었다.
“고양이 수염이 행운을 가져다준대. 이건 자기 차에 둘게요!”
몇 달 뒤, 까망에게 사진 한 장을 받았다.
“파랑! 커피 방향제 치우다가 줄리 수염 나와서 폰 케이스에 붙였어! 어때?”
“귀여워!”
줄리가 떨어뜨린 수염 하나로 이렇게 행복해지는 우리 사이가 새삼스레 너무 좋았다. 고양이 수염이 가져다준 내 행운은 아무래도 까망인가 봐.
---pp.69~73 「1장 10. 고양이 수염」 중에서
“자기야,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야생고양이로 태어나고 싶어.”
“자기는? 다시 태어나면 뭐로 태어나고 싶어.”
“바위로 태어날래. 아무것도 안 하면서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니! 멋지지 않아?”
“그럼 나는 그 바위에서 일광욕해야겠다.”
“만약에… 다른 고양이랑 친해지면 자기 위에 같이 누워도 돼?”
“안 돼!”
“!”
“내가 아무리 바위라도 파랑이 다른 고양이랑 있는 건 절대 안 돼!”
---pp.71~81 「2장 01. 안 돼」 중에서
머리 감으려고 고개를 숙였는데, 어디선가 까망 냄새가 확 풍겼다. 내 머리카락에서 나는 냄새였다. 익숙한 냄새에 기분이 좋았다. 샤워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감정뿐만 아니라 감각에도 영향을 주겠지? 꼭 섹스가 아니더라도 사랑만큼 오감이 충족되는 행위가 있을까? 감정과 감각을 공유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지.’
“아까 씻기 전에 내 머리에서 까망 냄새가 났어. 신기하지?”
“그럼 내 머리에선 파랑 냄새 나려나?”
까망을 안고, 키스하고, 숨소리를 듣고, 살 내음을 맡을 때… 그때만큼은 아무 걱정이 없다. 지금처럼 모든 게 다 잘 될 것만 같다. 매일 자기 전 서로의 목소리와 체온, 체취로 자신감을 충전하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다니!
“자기를 만난 걸 보면 난 운이 좋은가 봐.”
---pp,113~116 「2장 07. 내 머리칼에서 까망 냄새가 나」 중에서
“근데… 있잖아.”
“우리 요즘 섹스 너무 뜸한 거 같지?”
“하고 싶은 사람이 분위기를 잡고 꼬셔야지.”
“까망은 내가 꼬셔야지만 나랑 하고 싶어?”
“나는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거 별로라고 했잖아. 그런 분위기가 되면 그때 하는 거지….”
“왜 까망은 맨날 그렇게 말해. 까망이 섹스를 하고 싶은지 아닌지를 알아야 분위기를 잡든 말든 하지. 그리고 섹스는 같이 하는 건데 그럼 분위기도 같이 만들어야 되는 거 아니야?”
---pp.153~155 「2장 14. 계획적 섹스」 중에서
이상한 느낌에 잠에서 깼는데…
“엄마?”
엄마가 가위로 내 손가락을…
“엄마 미쳤어?”
손끝에 닿았던 차가운 가위 날 때문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내가 왜 미처 몰랐을까? 너… 그거 안 돼.”
“뭐가 안 된다는 거야. 왜 그래?”
“세상에 가운데 손가락이 긴 사람은 없어. 남들이 알기 전에 얼른 자르자.”
---pp.235~237 「3장 10. 괜찮아 악몽이야」 중에서
오랜만에 가족 모두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잘 먹겠습니다.”
“우리 집에 술 못하는 사위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
“어머니는 저랑 드시면 되죠!”
다 좋았는데 단어 하나가 계속 신경 쓰였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데, 우리 사위 많이 먹어.”
“딸의 아내는 며느리일까, 사위일까?”
나의 물음에 언젠가 이런 답변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게 뭐가 중요해. 너희 둘이 행복하면 그만이지.”
정말로 둘이서 사랑하고 행복하면 그것만으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까망의 배우자가 되고 싶고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자 자리를 지키고 싶다. 나는 우리가 비혼 1인 가구가 아니라 2인 가구, 한 가정으로 인정받길 원한다. 왜 우리는 많은 것에서 당연하게 소외되고 그걸 감수해야만 하는 걸까? 세상은 언제까지 우리를 모른 척할까.
---pp.261~265 「3장 14. 딸의 아내는 뭐라고 부르나」 중에서
까망이랑 사귀면서 주변에 커밍아웃을 했다.
“나 까망이랑 사귄다!”
“그렇게 좋냐?”
“쟤, 입꼬리 올라간 거 봐.”
그전까지 밝힌 지인은 중학교 친구 두 명이 전부였다.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쉽게 얘기하지만 결심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대충 넘어가면 그만인데, 그냥 말하지 말까? 괜히 얘기했다가 잘못되면 어떡해?’
‘다 털어놓고 싶다. 매번 거짓말할 때마다 위축되는 기분 견디기 힘들어. 솔직하게 얘기하고 싶어.’
---p.333 「4장 06. 커밍아웃」 중에서
“까망, 이거 봐. 인스타에 온라인 퀴퍼* 열렸어.” *퀴어 퍼레이드(Queer Parade)의 약어.
“몇 년 전에 우리 퀴퍼 행진 했잖아. 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지! 재밌었잖아.”
“이렇게 다 같이 도심 행진하니까 너무 신난다. 까망도 그래?”
“나도! 뭔가 벅차올라.”
---pp.361~365 「4장 10. 우리 동네 퀴퍼」 중에서
2030년 6월.
까똑. 까똑. 까똑.
기사 봤어?
내년 1월부터 대한민국 동성부부 혼인 가능.
대박!
진짜야?
“뭐?”
“파랑! 이거 봤어?”
---pp.375~377 「4장 12. 2030년 어느 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