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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벌꿀, 내일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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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96쪽 | 246g | 115*188*20mm
ISBN13 9791190187251
ISBN10 1190187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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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일 인생이 끝난다면 나는 진심으로 기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도화지를 끼워놓은 화판을 끌어안고 미도리는 강둑을 걷는다. 교복 스카프가 바람에 팔락거렸다. 오늘 사생대회는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까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면 되기 때문에 평상시 수업보다 훨씬 마음이 편하다. 그러나 찍어둔 장소는 이미 다른 학생이 차지해 버려서 좀 떨어진 곳으로 가려고 걷는 중이다. 아무도 없는 곳, 혼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곳으로. 혼자 있고 싶었다.
---「첫 문장」중에서

그 이야기를 회사에서 했더니 40대 파트타임 근무 여성이 “액년에 출산하면 액막이가 된다던데. 2년 정도 후에 출산해 버려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 말에 미도리는 더 망연자실했다. 안자이와 만난 지 9년, 연인이 된 지 8년, 같이 산 지 2년째이지만 결혼에 관해 조금이라도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시간 약속이나 정리 정돈에 있어서는 다소 허술함을 보이는 안자이가 피임만큼은 철저한 것을 보면 아마 실수로 인한 임신, 그로 인해 상황에 떠밀려 하는 결혼은 절대 피하려는 것일 테고 애초에 액막이를 위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태어날 아이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 p.22

안자이는 얼굴에 노기를 띠고 말했다. 미도리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애초에 왜 이처럼 “스물한 살짜리한테 존댓말을 써가면서 눈치 봐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가 하니, “그건 네가 지금까지 이곳저곳을 전전해 왔기 때문이고, 전전하는 동안에 당연히 나이를 먹었으니까 선배라고 해도 나이가 상당히 아래인 상황도 앞으로 얼마든지 있을 테지. 그뿐이겠어? 경영자가 너보다 연하인 기업도 얼마든지 나타날 거야. 네가 존 레넌도 아니고 ‘상상해 봐!(대표곡‘Imagine’을 의미)’ 운운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사람은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고! 아니 그러고 보니, 너, 다음에도 일 가르쳐주는 상대가 너보다 젊으면 또 그만둘 셈이야?” 이런 마음을 말다툼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원만하게 전할 방법은 없을까? 아니 없다. 있을 리가 없다. 차라리 “아, 그렇구나, 그럼, 어쩔 수 없겠네. 다음 기회를 찾아보자.”라고 말하고 가볍게 흘려버리는 게 나을까?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그건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다. 어쩌면 좋을지 머뭇거리다가 결국 미도리의 입에서는 얼빠진 듯한 목소리로 “뭐라고?”라는 소리가 나왔을 뿐이었다.
--- p.42

“그저께 겨우 아버님 뵈었다고 했지? 뭔가 말씀하셨어?”
“뭔가, 라니?”
“아니, 그거, 겨, 그러니까, 겨.”
결혼이라는 두 글자를 입 밖에 내는 것이 미도리는 낯간지럽다. 수줍어하면서 안자이를 흘끗 곁눈질하니, 옆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왜 그래?”
“안자이?” 얼굴을 들여다본다. 안자이는 순간 눈길을 피하더니 엄청난 기세로 미도리 쪽으로 돌아보고,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으더니, “미안!” 하고 차내에 쩌렁쩌렁 울리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맞은편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초로의 남성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아버지한테는 아직 얘기 안 했어.”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였다.
“뭐?”
“말하지 않았다니 뭘? 어디부터?” 안자이의 팔을 꽉 붙들고 흔들었다.
“그러니까, 전부.”
--- p.61

“쓰카하라 씨.”
안자이 아버지가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고는 탕, 하고 소리를 내며 정교하게 새겨진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무능한 아들 녀석과 몇 년이나 사귀어 온 당신도 똑같다고 생각해. 남자를 포기할 타이밍을 놓치고 나이만 먹은 여자인 거지.”
“인제 와서 다른 남자를 찾는 건 만만치 않겠지만,”이라고 하며 안자이 아버지가 꺼낸 말을 미도리는 “저는 무능하지 않습니다.”라고 막았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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