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강에 천 개의 달이 뜨는 밤이면, 나는 이야기들의 나무로 향한다. 그곳에서는 어찌나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는지! 이 세상 각지에서 모인 이야기들이 밤새도록 무도회를 벌이면서 향기로운 음료를 마시며, 지칠 줄 모르고 자기 삶에 대한 수다로 거대한 나무 속의 공간을 가득 채운다. 단 한 번도 같은 선율이 반복되는 법이 없는 현란한 음악 속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이야기들, 지금까지도 되풀이되는 이야기들, 아직 시작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서로를 만나고 또 다른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그 풍경이란! 정말, 나같이 솜씨 없는 평범한 이가 그걸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
(...)
아무튼 내가 이 이야기들의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스크룬하이’라는 젊은 모크샤에 대한 것인데, 내가 마침 그 전설의 주인공을 만나는 영광을 누렸으니 어찌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고로 어떤 이들은 모크샤라는 신성한 존재가 고대 용의 후손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내가 실제로 보니 오히려 불사조나 동방의 붕새 (『장자』의 「소요유」 편에 나오는 전설 속의 새)를 닮은 것도 같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참아낼 수 없는 것을 참아내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만 진정한 모크샤가 될 수 있다고 하던데. 도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길래? 나는 궁금증을 견딜 수 없어 그의 위엄이 주는 두려움을 삼키고 사정을 묻기로 했다.
난생처음 모크샤의 장대한 모습을 본 그 순간은 아직도 생생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는 이야기들의 나무 맨 꼭대기 가지에 조용히 앉아, 자줏빛과 황금색이 오묘한 무늬를 이룬 부리로 금강석같이 첨예하고 찬란한 겉 비늘과 진주처럼 온화하게 빛나는 속 깃털들을 다듬고 있었다. 그의 모든 움직임이 마치 솔잎에 이는 바람처럼 조용했기에 다른 이야기들은 그가 이 나무에 왔는지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때마침 나는 나무 꼭대기 층에 있던 작은 방의 창문 너머로 그를 발견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모크샤가 바로 내 눈 앞에 있다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타오르는 흑갈색 불꽃과 같이 아득한 그의 두 눈동자란! 정말이지, 그가 나를 바라봤을 때처럼 심장이 떨렸을 때도 없었을 것이다.
모크샤 자체가 정말 드물게 나타나는 존재인 만큼 그가 세상에 출현했던 이야기와 그것을 전하는 방법 또한 범상치 않았다. 나는 황송하게도 그의 부리에 손을 얹는 영광을 누렸고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촤르르 열리는 그의 겉 비늘이 마치 일렁이는 파도에 반짝이며 부서지는 달빛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그 강렬한 빛에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바로 그 찰나, 나는 감은 두 눈으로 정말이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젊은 모크샤가 살아온 그 엄청난 나날들을. 스크룬하이가 날개를 펼치는 순간에 나의 의식은 이미 그의 생이 있었던 시간과 공간에 다녀왔던 것이다. 그건 말이 필요 없는 이야기였으며, 그것이 그가 이야기하는 방식이었다.
내가 체험한 그의 역사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것인지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들의 나무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오로지 날갯짓을 한 번 했을 뿐이었다. 경이로워하는 나의 얼굴을 보고 그는 웃으며 (적어도 나는 그가 웃는다고 느꼈는데)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세상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여행자’이며 진실되어 보이기에 그의 기억에 초대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의 이야기를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새벽달이 빽빽한 나뭇잎들을 푸르게 비추고, 그가 마침내 저 수평선 너머로 날아올라야 할 시간이 올 때까지, 나와 스크룬하이는 호기심 어린 별들이 빛나는 밤하늘 밑에서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덧붙여 이야기해 준 예전 백일곱의 모크샤들의 전설만 하더라도 어찌나 대단하던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만난 108번째 모크샤 ‘스크룬하이’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이니, 그건 다음 세상의 달이 뜰 때 이어 나가도록 하겠다.
---「이야기를 펼치며(프롤로그)」중에서
“울타리는 표식이야. 크게 떠벌리고 다니지 않아도, 이곳이 누군가의 영역 이라고 보여주는 거지. 목장들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저마다 울타리가 있어. 그렇지 않니? 그 울타리를 무시하고 함부로 남의 영역에 들어갈 때 약탈이 일어나는 거란다. 그게 바로 고통의 시작인 게야. 눈에 보이는 약탈은 남의 재산을 훔치는 거고, 보이지 않는 약탈은 자유를 훔치는 거지.”
--- p. 76
“물론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 수도 있겠지. 다가올 나날들을 두려움으로 허비하면서 말이야. 그렇지만 그때까지 시간을 아낄 수도 있어. 그리고 그렇게 아낀 시간은 중요한 것을 바꿀 수 있단다.”
“시간을··· 아낀다고요?”
“그래. 그리고 시간을 아끼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곧고 빠른 길로 가는 것 이지.”
“그, 그게 어떤 길인데요?”
“네 진심을 따르는 거란다. 진심을 다한 선택은 새로운 운명을 만들 수 있거든.”
--- p. 152
“사실, 네 말대로 아픈 기억은 평생 사라지지 않는단다. 다만 조금 색이 바랠 뿐이지. 그리고 치유될 수 없는 상처들도 있어. 날마다 덧나고,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지치게 하는 그런 영혼의 상처들 말이다. 그런데도 네 아버지는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너와 함께 남아 있기를 선택했구나. 삶이 주는 힘든 짐들을 모두 떠안고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 그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란다.”
--- p. 155
‘두려워서, 혹은 부끄러워서 하지 못하는 말과 행동들 말이다. 마음속에서는 올라오는데 계속 꺼낼 수 없을 것 같은 진심. 그걸 솔직하게 표현하고 사는 것이 바로 시간을 아끼는 좋은 방법이란다.’
--- p.162
“그래. 언뜻 보면 선장은 이래라저래라 지시만 내리는 것 같지만, 사실 가장 복잡한 능력이 필요한 사람이란다. 왜냐하면 모든 일을 다 잘할 수 있어도, 그 모든 걸 자신이 직접 나서서 다 해버려서는 안 되거든. 선장은 자신의 선원이 하는 일들을 믿고, 또 선원들은 그런 선장의 지시를 믿고 따라야지 배가 가라앉지 않으니까. 내가 오늘 너를 꾸짖은 이유를 알겠니?”
보리얀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제 행동을 눈감아 주셨다면 규율에 대한 믿음과 약속이 깨지게 될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돌발행동을 하는 선원들이 늘어날 수도 있고요. 그럼 결국 나중에는 선장도, 선원들도 서로의 일과 판단을 믿을 수 없게 될 거예요.”
“그렇지.”
바얀이 보리얀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는다.
“바얀 호나 스루딘 호처럼 배가 선장의 이름을 따르는 이유는, 선장이 그 배와 운명을 같이 하기 때문이란다. 그만큼 선장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거지. 선장이 각 선원의 재능과 역할을 잘 이끌어 주려면, 그들의 일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자질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해.”
--- p.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