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크의 작업은 쉽지 않았다. 프랑스는 오늘날 그렇듯이 지리적 환경으로 봐서나, 보통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정착민이 뒤섞여 살면서 끼친 색다른 여러 자취로 봐서나, 또 우리가 프랑스적이라고 부르는 땅에 대한 여러 경합하는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영향으로 볼 때나, 서로 매우 다른 지방들로 구성된 나라였다. 그래서 대단히 복잡할 수밖에 없었던 농업사의 기본특성을 도출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작업은 필요불가결하였다.
---「뤼시엥 페브르의 머리말」중에서
역사는 무엇보다 변화에 관한 학문이다. 나는 여러 가지 문제를 검토하는 가운데 이런 진리를 절대로 잊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만 현재와 가까운 시기의 희미한 불빛으로 그보다 훨씬 먼 과거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경지제도와 관련해서 그랬다. (중략) 그러나 과거를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살펴봐야 하는 것은 현재이거나 적어도 현재에 아주 가까운 과거인 경우도 있다.
---「서론: 연구방법에 대한 몇 가지 고찰」중에서
결국 우리는 여기서 프랑스의 개간활동을 유럽적인 차원의 현상으로 보고 다룰 수밖에 없다. (중략) 개간활동과 관련된 프랑스 고유의 특징은, 예컨대 독일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징과 비교해 볼 때, 가스코뉴 지방을 제외하면 거의 전적으로 국내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십자군의 소수 국외이주나 노르만족의 정복지 및 동유럽-특히 헝가리-도시들로의 몇 안 되는 이례적 인구유출 외에는 국외이주가 없었다. 프랑스의 개간활동은 국내에서 특별히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요컨대 이 문제에 관한 진상은 명확하다. 그러나 그 원인은 무엇일까?
---「제1장 개척의 주요 단계」중에서
바퀴달린 쟁기로부터 기다란 모양의 경지가 필연적으로 생겨났고, 기다란 경지로 말미암아 집단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유지되었으며, 보습에 덧댄 차대로부터 전체 사회구조가 생성되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추론하는 것은 인간 능력의 무한한 가능성을 망각하는 것이라는 점에 유의하자. 바퀴달린 쟁기로 인해 불가피하게 밭들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쟁기가 밭의 폭까지 좁게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제2장 농경생활」중에서
우리는 가축의 수를 늘리기 바라는 농민들에게 영주 소유의 거세하지 않은 황소와 수퇘지의 사용을 사용료의 지불 아래 강요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보통 도리깨로 두드리지 않고 말발굽으로 짓밟게 해서 탈곡하는 프랑스 남부에서는, 다수의 영주가 탈곡 작업에 비싼 사용료를 받고 대여하는 말을 농민보유지 보유자들이 사용하지 않고 다른 가축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곤 했다. 마지막으로, 꽤 자주 영주의 독점권은 더욱 터무니없는 양상을 보이곤 했다. 예컨대, 영주는 일년 중 몇 주 동안은 오로지 자신만이 이런저런 물품을 판매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보통 포도주가 그 대상이었으며, 이것이 ‘포도주 우선판매독점권’(banvin)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3장 14~15세기 위기까지의 장원제」중에서
지대 수입의 감소는 유럽적 현상이었다. 다소 활력을 회복한 영주 계급이 재산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 역시 유럽적 현상이었다. 프랑스에서처럼 독일, 영국, 폴란드에서도 동일한 경제적 참극이 전개되어 비슷한 문제들을 낳았다. 그러나 나라에 따라 사회적?정치적 조건이 달랐던 만큼 피해를 회복하기 위한 대응방법도 상이했다.
---「제4장 중세 말부터 프랑스혁명까지 장원제와 토지소유의 변천」중에서
프랑스의 농촌사가 안개 속을 벗어나기 시작하던 이른바 중세 초기에는, 토지보유의 단위인 동시에 인간의 사회적 구성단위이기도 했던 것이 촌락 및 장원과 같은 상대적으로 큰 집단조직의 하부에 위치하면서 농촌사회의 기본적 세포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작은 인간집단이 거주하는 주택과 이들이 경작하는 일단의 농토로 구성된 그것은 프랑크 시대의 갈리아에서는 거의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이것은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가장 널리 불린 이름은 ‘망스’(manse, 라틴어로는 mansus)였다.
---「제5장 사회집단」중에서
구 프랑스에서는 어디에서나 황야, 늪지대, 숲이 주민들의 집단 이용에 국한해서 사용되었다. 울 쳐진 경지제가 실시된 지방에서 경작자가 자기의 농경지를 완전히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하는 경우에도, 농경지의 이런 자유로운 사용은 정확히 말해서 공유지로서의 황무지가 존재함으로써만 가능했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국의 대부분에서 농경지 자체도 주민의 집단적 이익을 위해 사용되도록 강력한 규제를 받았다. 새로운 학파의 농학자들은 이런 공동체적 관습에 대한 반대투쟁을 개시했다. 이들 농학자는 “프랑스의 과거 미개함의 잔재”인 공유지가, 현명하게 이용되었더라면 많은 수확물을 산출하거나 보다 많은 가축떼에게 먹이를 제공할 수 있었을 대규모의 비옥한 토지를 헛되이 놀리게 했다고 비난했다.
---「제6장 농업혁명의 개막」중에서
프랑스 대혁명기의 의회는 농민을 영주에 대한 부담들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16세기 이후 토지에 대한 농민의 권리를 그리도 위태롭게 했던 부채의 가장 큰 원인들 가운데 하나로부터 농민이 벗어날 수 있게 했다. 대체로 볼 때, 그리고 세부적인 차이 - 이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 중요한 연구과제이기는 하지만 - 를 무시한다면, 구체제 아래서 기틀이 잡힌 자본주의적 형태의 대토지소유와 농민적 소토지소유의 공존은 혁명으로 새롭게 태어난 프랑스에서도 지속되었다고 요약될 수 있다.
---「제7장 현재에 대한 과거의 영향」중에서
이 책은 단순히 지나가 버린 과거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 특징을 적시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저자 자신이 살던 20세기 초엽의 현대 프랑스 농촌사회의 기본특징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생겨났는지를 해명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저자에게 역사는 죽은 역사가 아니라 현재의 사회적 삶과 연결되어 살아 있는 역사이고, 현재 사회의 기본적 의문 현상들을 해명할 수 있는 열쇠가 간직되어 있는 역사이다. 그의 프랑스 농촌사는 현재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옮긴이 해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