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병합’ 후인 1912년 도쿄 유학생을 망라하는 단체로 ‘학우회’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의 목적은 유학생 간의 친목 도모, 민족운동, 특히 조선어 출판물 간행을 통한 계몽 활동 전개였다. 학업이 본분이어야 할 유학생이 계몽 활동에 주력한 배경에는 조선을 통치하는 조선총독부의 식민 지배 정책이 존재한다. 선언서에서도 강하게 비판했듯 당시 조선총독부의 ‘무단정치’ 정책으로 조선인의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현저히 제약받고 있었다. 조선인에게는 고등교육을 시행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있어 대학도 설립되지 않았다. 고등교육을 받으려는 조선인들은 가장 가까운 ‘근대’ 도시 도쿄의 대학으로 유학해 공부뿐 아니라 일본의 신문지법의 범위 내에서 가능했던 언론 및 출판 활동에 힘썼다. 이러한 상황은 학우회 기관지로서 1914년에 창간된 『학지광』에 잘 드러나 있다.
--- p.19~20
2.8독립선언의 직접적 계기는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이다. 주요 내용은 파리강화회의에서의 민족자결 적용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언서는 미국과 영국, 그리고 1920년에 발족할 국제연맹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는 한편, 앞부분에서는 ‘세계 각국’을 향해 독립을 선언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세계’가 ‘정의’로써 ‘개조’된 것을 높이 평가하는 서술도 있다. 요컨대 조선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논의될 민족자결의 대상에서 제외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든 국가의 모든 문제에 적용’될 보편적 권리로서의 민족자결을 요구한 것이다. 선언서에서는 ‘정의와 자유에 기반한 신新국가’로서 중화민국과 혁명 후의 러시아(소비에트 러시아)를 높이 평가했다. 이는 혁명파 중국인의 도움을 받으며 볼셰비키가 제창한 민족자결을 촉구한 조선인 유학생의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한 구절이라 할 수 있다.
--- p.34~35
3.1독립운동 이후 조선총독부의 조선 통치방침은 조선인에게 일본인이 될 것을 강요하는 일방적 ‘동화同化’에서, 덜 강제적이고 쌍방적 뉘앙스를 풍기는 ‘융화融化’로 바뀌었다. ‘융화’는 ‘동화’를 기조로 하면서도 차별대우 완화 및 독립운동에 대한 대책으로 조선인 엘리트의 회유·포섭을 중시했다. 그 일환으로 2.8독립선언의 주역이자 젊은 엘리트인 유학생들에 대해서도 ‘내선융화’ 슬로건 아래 통제를 강화하면서도 지원을 하는 등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다.
--- p.57
1910년대 후반 “당시 조선인의 민족자결운동 내지 민족독립운동, 이를 목적으로 한 계몽문화운동은 타이완인의 운동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도쿄 유학생의 경우 이미 여러 단체를 조직해서 기관지 간행이나 사상·선전 보급 등을 하고 있었는데, 타이완인 유학생들이 점차 그에 합류했다. 『아세아공론亞細亞公論』 주간 류수천柳壽泉[柳泰慶]과 차이페이훠蔡培火, 린청루林呈祿의 친교, 그리고 이들의 『아세아공론』에 대한 빈번한 투고가 그를 증명한다. (중략) 도쿄 체류 타이완인 유학생들은 조선인 민족운동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계발회啓發會나 신민회新民會 등을 조직하거나, 잡지 『타이완청년臺灣靑年』을 창간했다. 그리고 타이완의회설치청원운동에 뛰어드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도쿄의 조선인들과 연대를 모색했다.
--- p.102~103
해방 후를 살았던 재일조선인들에게 (중략) 3.1독립운동은 역사인 동시에 하나의 경험이었다. (중략) 내무성 통계에 따르면 1919년 현재 재일조선인 수는 2만 6,605명이며, 해방 후와 같은 수준인 60만 명에 달하는 것은 1935년의 일이다. 요컨대 해방 후를 살았던 재일조선인 대다수는 1919년 당시 일본이 아니라 조선에서 ‘3.1’을 경험한 것이다. 반대로 ‘2.8’의 경험자들 대부분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에서 조선이나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이것이 한국에서는 독립운동의 도화선으로 ‘2.8’을 기억하고 해방 직후 재일조선인은 주로 ‘3.1’을 기념하는 ‘기억의 교차’가 발생한 하나의 배경이다.
--- p.164~165
해방 전후의 재일조선인 운동은 1920년대 이래 전통을 계승하여 일본의 혁신운동, 특히 일본공산당과 연대의 관계를 쌓아왔다. 한편 오노의 논문이 밝힌 중국이나 타이완과의 관계를 포함해서 아시아와의 연계 또한 해방 후 단절되었던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기획 의도를 앞으로 더욱 확장해가기 위해서라도 재일조선인의 다른 아시아계 제 민족과의 연대 시도를 보여주는 1947년 ‘재일범아시아민족회의在日汎アジア民族會議’ 경험에 대해 언급해두고자 한다. ‘재일범아시아민족회의’는 1947년 3월 23일부터 4월 2일까지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아시아관계회의’에 호응해서 개최되었다. (중략) 아시아관계회의에 참가한 것은 28개국과 국제연합, 아랍연맹, 시드니·모스크바·런던·뉴욕의 국제문제연구소, 태평양관계연구소, 인도연구소 등의 대표자들이다. 일본은 점령군이 허가하지 않아서 대표단을 보내지 못했다. 회의에서는 ① 아시아 각국의 해방운동 비교 검토 ② 인종문제 ③ 아시아 내 이주 및 이민의 지위와 처우 ④ 식민지경제로부터 민족경제로의 이행 ⑤ 농업 및 경제개발 ⑥ 공중위생, 영양 및 노동복지 ⑦ 문화협력 ⑧ 아시아에서 부인의 지위와 부인운동 등이 의제가 되었다. 또한 참가국 중 ‘조선’ 대표는 미군 점령하의 남한에서 파견되었다. (중략) ‘재일범아시아민족회의’(중략)는 역사적인 아시아관계회의에 ‘호응’하여 “재일본 아세아 각 민족의 항구적인 협력”을 꾀하기 위해 조련朝連을 중심으로 결성된 회의였다. 연락사무소를 조련중총외무부회의실朝連中總外務部會議室에 두고, 1947년 4월 5일에 ‘재일본아시아연락위원회’를 결성했다. 중국 대표로는 강원팡甘文芳, 마차오마오馬朝茂(이상 두 사람의 출신지는 타이완이다), 조선으로부터는 조련의 은무암殷武岩, 강성재姜性哉가 참가했으며, 그 외에도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대표가 참가했다. 대표로 강원팡이 선출되었고, 아시아관계회의의 결의를 구체화할 것과 아시아연락위원회를 도쿄에 설립할 것을 결정했다. 구체적인 활동으로는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에 대한 독립전쟁을 지원하거나 각국의 친선을 위한 문화제, 인도나 인도네시아의 독립축하제 등을 개최했다.
--- p.170~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