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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지 않는 소리

푸른사상 소설선-43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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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1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240쪽 | 354g | 146*210*14mm
ISBN13 9791130820057
ISBN10 113082005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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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환에게 자리를 피해달라고 했어. 내일 가는데, 너랑 시간을 보내고 싶었거든. 은재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웨이브진 갈색 머리가 어깨 너머에서 찰랑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낯설었다. 자신과 무관한 어떤 손님 같았다. 어디든 뱀은 존재해. 숲을 거닐다가 나는 뱀의 매력에 빠졌고, 넌 뱀과 함께 있는 나를 보고 비명을 질렀을 뿐이야. 그 비명을 들은 사람이 하필 네 아빠인 게 문제였지. 네 아빠랑 나는 서로 맞지 않았던 거야. 그런 거야. 너에게 한번은 변명하고 싶었어. 뱀? 겨우 뱀이라고? 은재는 탁자 밑에서 두 손을 꽉 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뱀, 34쪽」중에서

그녀는 맥없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심장이 벌렁거려 운신할 수가 없었다. 딸의 죽음을 남의 입으로 들은 것은 오래전이었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마음으로는 그것이 가능했다. 딸은 매순간 살아 있었다. 때론 멀리 가 있기도 했고, 가까이에서 자신을 지켜보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그녀의 마음속에서 딸은 숨을 쉬었고, 만질 수 있었고, 그리고 얘기를 나누었다. 딸이 밤에 들어오지 않는 건 출장을 갔기 때문이었다. 같이 밥을 먹지 못하는 건 야근 때문이었다. 새댁이 한 말은 열심히 일하는 딸에게 퍼부은 악담이었다. 마음 같아선 문을 열고 들어가 새댁의 머리채를 잡아 마구 흔들고 싶었다. 더없이 소중한 딸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하지만 새댁에겐 친정엄마가 함께 있다. 그보다 든든한 배경이 또 어디 있으랴. 그녀는 손을 귀에 댔다. 좋은 소리는커녕 겨우 이런 소리를 듣자고 보청기를 했나 싶었다.
---「들리지 않는 소리, 126쪽」중에서

“섬에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어.”
수희의 말에 수인은 터지려는 비명을 참기 위해 한숨을 몰아쉬었다. 엄마나 수희나 모두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할머니 말에 어깃장이 일었어. 할머니가 뿌리라는 유골을 손에 꼭 움켜쥐고 있다가 집에 와서 작은 병에 담아 화단에 묻었어. 이사한다는 말에 옆집 언니를 졸라 배를 타고 아버지를 섬으로 데려갔어.”
수인은 기분이 미묘했다. 아버지가 섬에 있다니, 위안이 되는 한편으로 묘하게도 질투가 일었다.
“아버지는 엄마를 기다렸어. 아버지가 바다로 흘러가면 엄마가 와도 영영 만나지 못할 거 같았어. 어린 마음에 모래밭보다 나무 밑이 나을 것 같아 가장 큰 나무 골라 땅을 파고 꼭꼭 숨겼어. 커봤자 내 키보다 조금 높은 나무였지만 말이야.”
---「섬은 기다린다, 84~85쪽」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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