쿰은 새로운 꿈이 생겼다. 저 집에 들어가 피아노를 배우고, 피아노를 치고 싶다는 꿈이었다. 그러나 쿰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신체 조건상 피아노 연주는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열 손가락을 자유롭게 움직여 연주해야 하는데, 쿰은 오른쪽 손만 겨우 사용한다. 한쪽 손으로 무엇이든 하고 있었다. 그런데 피아노라니? 가당치 않았다. 쿰은 속상했다. 자신은 늘 하고 싶은 일에, 몸을 먼저 생각해야 하고, 너무나 많은 제약과 구속이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이 어린 마음을 답답하게 했다. 왜 이렇게 할 수 없는 게 많은 것인지? 다른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은데, 유독 자신만이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지 화가 났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데,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넘어가야 하는데,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쿰은 어느 날, 용기를 냈다. 초록색 지붕집 앞을 지나가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피아노 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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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엄마가 간식을 챙긴다. 역시 맛있고 예쁜 빵과 바나나 우유였다. 쿰은 엄마에게 단호하게 말한다.
“엄마, 이제 간식 넣지 마!”
엄마는 놀란 얼굴로 쿰을 바라보았다. 엄마가 많이 궁금해 한다는 걸 알지만, 쿰은 말해 주지 않았다. 쿰의 결심은 단호하고 단단했다. 자신의 몸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서, 불편하다고 해서, 보기 흉하다고 해서, 그것이 누군가에게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비굴해질 필요가 없다. 똑바르게 걸을 수 없어 흔들흔들, 비뚤비뚤 걷고, 불안한 발음으로 어눌하게 말하지만, 그 안에 정신만은 똑바르고, 정직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비굴하기보단 외로움을 택하는 편이 낫다고 결정했다. 현실은 바로바로 민낯을 보인다. 간식을 안 가져다 주는 날이 잦아지자 봄은 금세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불만을 행동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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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이었다. 봄은 그날 유독 더 신경질적이었다. 아주 이제 끝장을 보려는 듯 악다구니를 써 대며 다른 날보다도 더욱 심하게 쿰을 몰아세웠다.
“넌 도대체 왜 내 말대로 안 하니? 왜 내 말을 안 듣냐고? 시키는 대로 좀 하라고!”
이렇게 큰 소리 치다가 저도 모르게 쿰을 밀치고 말았다. 의자가 쿵하고 넘어지면서 쿰이 바닥에 내동이쳐졌다. 바닥에 철퍼덕 떨어져 앉는 순간, 쿰의 가슴속에서 더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올랐다. 바닥에서 간신히 일어난 쿰이 온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눈에서 레이저 불꽃이 쏟아져 나오기라도 하려는 듯 노봄을 쏘아 보며 말이다. 당장이라도 노봄을 날려 버릴 기세였다.
“내가 왜! 도대체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네가 뭔데? 도대체 네가 뭔데 그래? 네가 내 엄마야? 선생님이야? 죽고 싶어? 난 누구의 말도 안 들어. 난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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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지금도 소녀가 등장하는 오래된 성서 속 옛날이야기를 쿰에게 해 주었다. 엄마는 아직까지도 쿰이 그 소녀처럼 기적이 이루어져 벌떡 일어나 마음껏 달리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었다. 사실 쿰도 그런 상상과 기대를 해 본 적이 있다. 자신에게도 그 소녀처럼 기적의 존재가 나타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는 그런 장면을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깨닫는다. 그렇지만 쿰에게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옛날이야기 속 소녀처럼 눈앞에 기적의 누군가가 나타나진 않았어도, 자신에게는 그와 같은 기적을 가져다 준 많은 이들이 있었다고 말이다. 쿰의 엄마, 아빠, 할머니와 남동생, 선생님들, 피아노 학원 선생님, 그리고 사은이까지!
어쩌면 그들이 쿰에겐 순간순간마다 나타났던 기적의 사람들이었다. 쿰은 비록 정상적인 육체는 얻지 못하겠지만, 그들로 인해 마음과 정신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런 장애의 몸으로도 무엇이든 하고, 마음껏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쿰의 앞에 더 큰 어려움과 아픔이 있을지도 모른다. 노봄보다 더한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고, 언제라도 몸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쿰은, 그 모든 순간 속에서 꼭 꿈을 이룰 것이다. 초원을 맹렬하게 달리는 한 마리의 치타처럼 달려야만 한다. 쿰은 언제나 달리고 싶고, 달릴 것이다. 달리다 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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