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염려하는 것은 형평이라는 기준을 객관적으로 놓고 적용하느라 참된 올바름을 입 밖에 꺼낼 수 없게 되는 상황이다. 유형의 객관적 기준을 내놓으면 집단적으로는 통용 가능하고 올바름과 비슷해 보이는 것에 접근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올바름이 되지는 못한다. 억울하고 존중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것은 올바름이 실현되지 않은 상태다. 이러한 올바름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바로 민주 정체의 참다운 정치가들이다. 플라톤이 이러한 방식으로 올바름을 생각한 까닭이 뭘까?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의견을 내놓고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모든 시민이 주권자인 민주 정체에서 당파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면서 이런 걸 궁리한 것이다. 플라톤이 민주정을 반대했다면 이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다. 모두의 입을 닥치게 하는 억압과 통제의 방책이면 충분하니까. 플라톤은 민주정을 반대한 사람이 아니라 민주정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지성적으로 해결하려 한 사람이다. 민주 정체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덕목에 대해서 연구한 사람이다.”
--- p.127
“인간은 합리적이며 본성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은 이른바 ‘자유민주주의’가 불변의 것으로 전제하는 명제이다. 각각의 개인이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선택이 모이면 사회의 이익이 극대화된다고들 한다. 굳이 전체의 입장에서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부정하면 곧바로 ‘전체주의’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는 거짓 이분법의 잘못을 저지르는 논변이다. 인간이 언제 어디서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계산할 만큼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증명할 필요도 없다.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익이라는 것이 명백한 경우도 아주 많다. 그렇다면 전체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몇몇 개인이 극단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도 다른 사람들이 건전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거나, 그들 몇몇의 못된 짓 따위가 공동체에 큰 타격을 입히지 않을 만큼 공동체가 탄탄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건전함이 무너지는 사태, 이를테면 대규모 역병이 번지는 상황이면 인간의 이기심은 극대화되고 내 한몸 돌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는다. 이럴 때 최소한 통치자 집단 구성원이라도 자신의 몸과 이익을 돌보지 않아야 그 공동체가 유지된다. 우리는 투퀴디데스의 기록을 통해, 위기의 시대에 공동체가 어떻게 해체되고 사람들이 얼마나 사악해지는지를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반 아테나이에 역병이 번지면서 벌어진 사태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다.”
--- p.142
“『국가』는 공동체에 대해 논의하면서 가장 먼저 수호자들의 성향을 다루었다. 성향은 성격으로 이어진다. 수호자들이 올바른 도덕적 성격을 갖추려면 올바른 내용을 갖춘 시가를 배워야 하고 체육에 의한 교육을 받아야 하며, 그 둘을 잘 조화시켜야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이나 『수사학』에서 논의한 것을 참조하면, 인간의 성격(ethos)은 도덕적 의도(proairesis)에 의해 결정되고 도덕적 의도는 목적(telos)에 의해 결정된다. 성향 또는 성격은 일종의 도덕적 요소이고, 의지의 일정한 상태나 방향을 드러낸다. 도덕적 의도, 개인이 가진 지속적인 성향, 기풍과 감정 등이 모두 결합되어 인간의 행위가 나타난다. 올바른 수호자가 되려면 이것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만 하는 것이다. 성격은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생활세계에서 형성된다.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가 한 사람의 성격을 만드는 것이다. 거칠고 험한 곳에서 그런 것들만 보고 자라면 거칠고 험한 인간이 된다. 플라톤이 공동체 수호자들의 시가 교육에 잔뜩 공을 들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 p.251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요점 두 가지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두자. 첫째, 나쁜 상태의 네 가지 정체라는 말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논변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좋은 나라가 되어야 그 안에 사는 사람들도 좋은 사람들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사람들이 각자의 금고와 재산을 탐닉하면서 그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 정체의 타락을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 둘은 사실상 서로 맞물리는 관계에 있다. 좋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타락하게 되면 나라도 타락한다. 플라톤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적 퇴락이 체제의 쇠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는 정치 체제라는 구체적인 맥락이 거론되지 않은 채 쾌락이 인간의 삶 자체를 타락시키는 원인으로 지목되었는데, 『국가』에서는 쾌락이 아닌 부유함이 타락의 원인으로 거론된다. 플라톤은 훌륭함과 부유함은 상반된 것이라고 설정하고 정체의 변화를 설명한다. 이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부유한 사람들 중에도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은 있을 수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핵심적인 논쟁점이 부유함으로 집중된다.”
--- p. 319
“쾌락을 억제하고 없애면 인간이 행복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아주 옛날에 부처님 같은 분들이었고, 그렇게 말한 정치사상가는 없다. 심지어 플라톤도 없애야 한다고 하지 않고 조화를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쾌락을 기본값으로 가지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쓰면 이기심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심을 가지고 있다. 이기적 개인들이 그 쾌락을 충족시키려 하는 상태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다. 자연상태론은 새삼스럽지 않다. 플라톤도 과두 정체에서 민주 정체로 오니 누구나 자기의 쾌락을 충족시키려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말하는 민주 정체는 홉스가 말하는 자연상태인 것이다. 쾌락과 이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되면 자연상태가 된다. 이러한 자연상태의 이기적 개인들의 싸움을 그치게 하려면, 불법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면 된다. 즉 법을 강제한다. 그렇게 하면 불법에 대한 처방이 된다. 어떻게 하면 이기적 개인들에게 법을 지키게 할 수 있는가? 이타심을 가지라고 말하는 국민 계몽 캠페인 같은 것을 떠올리면 안 된다. 이 자연상태의 개인들은 민주 정체에 살고 있는 사람들처럼 영악하고 돈 계산이 투철하다. 이것을 홉스적 용어로 말하면 ‘합리적 개인들’이다.”
--- p.341
“민주정에서 생겨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여러 측면에서 제시될 수 있다. 첫째는 권력의 배분 방식에 집중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마키아벨리, 막스 베버 책임윤리를 강조함으로써 모두 이 문제에 집중하여 의사결정의 주체, 의사결정 방식 등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둘째는 반정치적(anti-political) 접근 방식이다. 이는 플라톤처럼 초월적 형상 세계를 정치권력의 궁극적 원천으로 제시하고 철학적 통치자의 탁월함에 의존하는 것인데, 일견 베버가 말하는 신념윤리만으로써 통치하는 방식이다. 플라톤의 방책이 과연 반정치적인 접근인지에는 의문이 있다. 그의 철학적 통치자는 초월적 이념을 아는 현인이기는 하지만, 앞서 사회·정치 체제에 관한 세 대화편에 관한 조망에서 보았듯이 정치술을 아는 기술자, 즉 다른 종류의 정치가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정치와는 무관한(non-political) 방식이다. 이는 지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것을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거나 국가를 현전하는 악의 제거를 위한 최소한의 필요악으로서만 인정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피안의 세계에 진정한 국가를 설정해야만 하고 그에 따라 정권政權과 교권敎權의 관계를 정당화하는 정치신학이 반드시 요구된다. 중세의 어중간한, 즉 정치와 무관한 방식이 결코 아니고 동시에 반정치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현실에 있어서는 권력의 배분방식에 집착했던 시대가 지나고 근대에 이르렀을 때 많은 사상가들은 이를 폐기하고 공론장에서의 쟁투를 통한 정치권력의 획득을 시도하였다. 그들이 가졌던 담론의 무기들은 인격신 종교를 추방하고 법적 인격으로서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홉스), 종교적 신념에 대한 일정한 관용(로크), 계몽주의(반종교주의 및 기적 추방)와 자연과학 등이었다. 그러나 종교가 사라진 자리에 역사와 신화를 들여온 역사주의와 낭만주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물론 선행하는 모든 시도들을 종합적으로 집약한 법실증주의, 즉 근대적 법치국가의 이념이 이를 물리친 강력한 힘이기는 하였다.”
--- p.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