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저는 오백여 년 전, 한 소녀의 마음에 담긴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소녀의 이름은 남아 있지 않고, 혼인한 뒤로 그저 ‘권씨 부인’이라고만 알려졌지요. 퇴계 이황이 상처(喪妻)한 다음에 새로 맞은 부인입니다. 소녀가 어릴 때 집안에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몰아쳐 왔습니다. 조선 중종 때 조광조 등이 희생된 기묘년(1519) 사화에 연루되어 하루아침에 멸문이 되다시피 하고, 그 와중에 소녀는 그만 정신을 놓아 버렸습니다.”
---「들어가며」중에서
“제 혼백이 몸을 벗어난 날은 1546년 7월 초이틀입니다. 갑작스레 닥친 초상이라 28일에야 발인을 하고 서소문 집을 떠나 예안 장지로 향했습니다. 광나루에 이르렀을 때 배편이 여의치 않아 지체해야만 했고, 상류로 거슬러 가는 뱃길은 더욱 더뎠습니다. 그러니 상주들과 집안사람들은 꼬박 한 달을 눈 한번 제대로 못 붙이고 마음 편히 쉬어 보지도 못한 셈입니다.”
--- p.19
“아버님께서 먼저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부인의 기제를 치렀다는 소식은 들었네. 아이들이 어리니 이젠 자네도 얼른 마음을 정해야겠구먼. 혹 어른들과 의논해 둔 곳이 있는가?’ (…) ‘이보게! 염치없는 소리라는 걸 잘 알고 있네만……, 자네가 내 딸을 거두어 주시지 않겠는가? 한번쯤 생각이라도 해 보시지 않겠는가?’”
--- p.44~45
“여전히 저는 산속 작은 달팽이 집이 그립습니다. 8월 초승달은 그곳에도 떠 있고, 남한강 나루터의 이 별들이 영지산 밤하늘에도 가득하겠지요. 지금도 아침이면 발아래에 안개가 자옥하고도 신비로운가요? 저물녘 분강에 비낀 노을은 여전히 슬프도록 아름다운가요? 아아, 달팽이 집 작은 마당에서 아침 안개와 저녁놀, 밤하늘의 달과 별을 당신과 함께 바라보고만 싶습니다.”
--- p.65
“서소문 집에서 당신과 함께 보낸 시간은 언제나 따뜻하고 뭉클했습니다. 틈이 나실 때마다, 혹은 어렵게 짬을 내어서라도 제 마음을 다독이고 다잡아 주려 하셨습니다. 화단의 나무를 옮겨 심거나 꽃모종을 내면서, 새롭게 돋기 시작한 초승달을 바라보면서, 혹은 깊은 밤 함께 자리에 누워서……. 누구와도 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저였지만, 당신과는 달랐습니다.”
--- p.91~92
“처음으로 아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당신과 한 아이를 보며 함께 웃고, 함께 애태우며, 그의 앞날을 그려 보고 싶다는 바람. (…) 우리가 떠난 뒤에도 계속될 아이의 삶에는, 함께 보낸 날들의 따스한 기억이 스며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없는 날들에도, 그 추억이 내내 그를 지탱해 줄 것입니다. 서로 나누었던 시간이 짧건 길건…….”
--- p.114
“출렁! 강물이 들썩이고 배가 크게 솟구쳤습니다. 우르르릉, 저 깊은 곳에서 강이 서서히 끓어오르는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공연히 으스스해집니다. 부르르 떨다 갑자기 어깨를 움찔거리는 이들도 있는데, 날씨 탓만은 아닐 테지요.
쿨렁! 뱃속이 크게 일렁였습니다. 그러더니 아랫자리가 차츰 따뜻해졌습니다. 이불을 걷어 보던 어멈의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산달은 내달이니, 그믐날이라 해도 아직은 일렀습니다. 꿈틀, 배가 또 한 번 크게 뒤틀렸습니다.”
--- p.141~142
“풍성한 수풀은 무엇이건 품어 줄 듯 한없이 너그럽고, 끝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어떠한 처지도, 어떠한 하소연도 다 받아들이고 다독여 줄 것만 같습니다. 서러운 이의 한숨 같은 흰 구름이 골짜기를 흐르다, 쉬었다 합니다. 제 속마음도 깊고 아득한 산골짜기에 토해 봅니다.
끄으으, 우으으?.
몸을 벗은 혼백 어디에서 이러한 소리가 나오는 걸까요? 혼백에까지 스며든 이승의 응어리가 다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우우으?, 저라고 당신 곁에서 더 지내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아으?, 이렇게 돌아온 저를 대할 당신의 아픔에, 저 역시 아프지 않겠습니까?
아아아, 아아아아?.
목 놓아 빈 울음을 소백산 골짜기에 흩뿌려 놓았습니다.”
--- p.164~165
“아아, 당신은 부디 마음 아파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아이의 명도, 저의 명도 거기까지였습니다. 짧았다 하나 아이는 이 세상에 다녀간 의미가 충분히 있었고, 아쉽다 하나 저는 당신 곁에서 충분히 행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리운 온혜로, 당신에게로 다시 돌아가고 있습니다.”
--- p.170